우리는 불과 3년 전만 해도 코로나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2020년 1월에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후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들의 일상사를 서서히 파괴해 나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정부나 매스 미디어에서 그토록 요란하게 선전한 것처럼,
백신을 맞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은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실제로, 코로나로 인해 적지 않은 환자들이 목숨을 잃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코로나와 같은 치사성 바이러스가 유행하면 사람들은 평소에 안 하는 행동을 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먼저, 나는 화장실에 가면 일을 본 뒤 전혀 거품을 만들지도 않고
비누를 손에 바르는 흉내만 내고 대충 닦곤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이 세상에 애착이 많아서 일찍 죽고 싶지 않은 지,
거의 1분 이상 비누 거품을 내서 손을 싹싹 비비곤 하였다.
‘손소독제’를 충실히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코로나와 같은 죽음을 몰고 오는 바이러스를 대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두려움’ 일 것이다.
내가, 내 가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걸려서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은 야구장에 가는 것을 머뭇거렸고,
많은 세미나들도 취소되었고, 심지어 많은 교회들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그런데 삶과 두려움의 관계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쪽에서는 코로나에 걸릴까 봐 두려워서 악착같이 살려고 하는 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살아가면서 생기는 삶의 무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죽으려 한다.
이렇게 볼 때, 두려움 그 자체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중립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두려움 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커다란 차이는 두려움 속에서 무엇을 보느냐 일 것이다.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비누칠도 하고 소독제도 바른다.
반면에, 두려움이 찾아올 때, 사방이 꽁꽁 막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조건만을 본다면
죽음을 택하고야 만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두려움을 느꼈다.
아버지의 사업의 실패로 인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을 때,
12살짜리 소년은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꼈다.
미국에서의 가난했던 유학 생활,
하루하루 줄어드는 은행 잔고를 보면서,
공부를 잘 마쳐서 학위를 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인생이 무사할 까하는 두려움이 내 안의 작은 틈을 파고들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자신만만했던 나,
그러나,
8개월 간의 무직 상태를 온몸과 영혼으로 받아내면서
오늘은 괜찮겠지... 내일은 나아지겠지
가족을 보면서,
수많은 일들을 잘 견디어 내었던 나 자신을 보면서,
두려움이 문득문득 내 목을 죄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두려움이 없는 삶이란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두려움이 찾아올 때,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마치 나에게는 슬픔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성격이 좋으니까, 착하니까, 이해심이 많으니까
나에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아니다. 나도 두려워한다.
다만, 나는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희망이다.
나에게 희망이란 절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의 마음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2010년 칠레에서 일어난 기적의 구출 사건을 기억한다.
33명의 칠레 광부가 무너진 광산에서 69일을 버틴 끝에
기적적으로 전원 구출된 일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살 수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에 대한 끈이었다.
그들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보았다.
그렇다. 생명이 희망이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났다. 지치고 힘든 분들이 많다.
아무리 일해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문을 열고 닫는 분들이 많다.
다시, 우리의 마음의 초점을 '살 수 있다'에 맞추고 두려움을 맞이하자.
절망과 두려움이 죽음이라는 음산한 초대를 시도하려고 할 때,
기억하자. 생명이 곧 희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