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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뷰티펄 Dec 08. 2018

아기의 찰진 손맛

사소하지만 내 감정입니다

집 근처에 유명 대형마트가 있다. 원래 대형마트를 잘 이용하지 않는 편인데, 한동안 시식의 매력에 빠져 주말마다 가곤 했었다. 이 얘기를 하려니 내가 너무나 찌질하게 느껴진다. 한두 번 다녀온 뒤로 몇 시쯤 가면 시식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지 대강 알게 되었다. 오후 4~5시에는 저녁 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나오는 어머님들이 많아 마트가 가장 활기를 띄는 시간이었다.    



자주 다니면서 시식 코스도 익숙해졌다. 입구에 들어서면 고기를 먹고, 옆 가게에서 채소볶음 간단히 한 입 먹고, 과일을 먹었다. 우회전을 해서 떡과 밑반찬, 만두, 소시지, 돈가스와 같은 냉동식품을 먹은 후에는 빵과 요구르트를 간단히 먹었다. 뒤편으로 건너가서 라면과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기다렸다. 미니 뷔페가 따로 없었다. 내 순서가 되어 판매원이 건네주시는 스파게티가 들어있는 작은 컵을 받았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있는 힘껏 내 머리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이건 마치 남편과 바람피운 불륜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드는 아침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본능적으로 “악!”소리와 함께 스파게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인상은 구겨졌다. 도대체 누군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돌아보았다.    


젊은 남자가 아기띠에 아기를 업고 있었다. 아기에게 마트를 구경시켜주려고 아기를 품 안에 업지 않고 바깥쪽을 바라보게 업었다. 그 아기가 손을 뻗어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든 것이다. 긴 머리를 보고 신기해서 잡은 걸까. 힘 조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기의 손맛은 너무도 강하고 아팠다. 무슨 이유인지 아기는 내 머리카락을 죽을 둥 살 둥 잡아 뜯었다.     


내가 화가 난 건 아기가 그랬으면 보통 부모들이 빈말이라도 죄송하다고 하던데 아기 아빠는 웃고만 있었다. 아기 손을 내 머리에서 떼어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굴욕감이 느껴졌다. 창피한 마음에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어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아기 손을 잡아떼어냈다.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속 머리끄덩이를 잡힌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사과 한 마디 없었던 아기 아빠는 끝까지 웃고만 있었고, 나는 무슨 죄를 졌는지 모르지만 황급히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보니 헝클어진 머리보다 허겁지겁 먹느라 미처 닦지 못한 소스가 입술에 묻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힘들지도 않았다. 밥을 먹고도 굳이 그걸 또 먹겠다고 시간과 에너지를 그런 곳에 썼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식탐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주체하지 못할 식탐 때문에 순수하게 재료를 사기 위해 맛을 보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못난 식탐이 부른 슬픈 참사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집착만이 아닌 감정적 허기를 느껴 이것저것 먹을 수 있는 대형마트를 찾았던 것 같다. 한 가지로 성에 차지 않았다. 모든 음식을 맛보고 배가 불러도 계속 집어먹곤 했다. 

  


왜 배가 불러도 뭔가를 먹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감정의 문제였다.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위나 장이 아닌 뇌다. 감정이 심란할 때는 배가 아닌 머리로 허기를 느낀다. 뇌의 포만 중추는 감정의 영향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는 만족감을 느끼고 분노나 슬픔, 외로움, 강박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면 식욕이 돋는다. 그때는‘신체적 허기’가 아니라 감정으로 인해 생긴 ‘감정적 허기’의 문제였다.    


감정적 허기가 생기도록 유발하는 것에는 스트레스, 불안, 우울, 수면장애, 일조량 부족 등이 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나는 철저하게 남의 요구에 맞추어 사는 일하는 기계이자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나보다 회사를 먼저 생각해야 했고, 상사의 갑(甲) 질에 시달리며 인간다운 삶은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내 안에는 분노가 쌓였다.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결국 나 자신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자꾸 무언가를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즐거움이 아닌 마음속 응어리를 풀기 위한 어리석은 몸부림이었다.  


분노나 외로움이 표출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했다.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했다. 이제 고작 세상을 1~2년 살아 본 아기의 찰진 손맛 덕분에 어리석은 짓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 후로 시식만을 위해서는 대형마트에 가지 않는다. 골고루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대형마트 미니 뷔페는 나의 식탐과 허기를 해결하기 위한 곳이 아님을 누구보다 아프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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