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내 감정입니다
15번 버스가 잠시 후 도착합니다.
위험하오니 한 걸음 안으로 물러나 주세요.
버스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들려오던 소리였다.
“참 친절하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이토록 친절하게 예고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춘천 예비신부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아빠 친구분의 조카였다. 이제 막 사회에서 걸음마를 시작하고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첫발을 뗀 앳된 청춘이었다. 피의자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신혼집 장만 등 혼수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라며 감정이 격해져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하지만 피해자 어머니는 혼수 문제는 언급조차 된 적이 없었다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살인사건이라고 말했다.
사건 당일 아침 피의자 A 씨는 갑자기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일단 와서 얘기하자”며 퇴근 후 춘천으로 오라고 요구했다. 피해자는 사정이 있다며 거절했지만 끈질긴 요구에 이기지 못해 “얼굴만 보고 오겠다.”라며 춘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제 피의자만 알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피의자는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도 남겼다. 하지만‘사랑’은 어떤 이유에서든 변명이 될 수 없다. 피의자의 감정이 정말 사랑이었다고 해도 삐뚤어진 잘못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점점 잔혹해지고 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식을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으로 만나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도 헤아려 줄 수 없다.
살인·강도·절도·폭력 등 4대 범죄사건 3건 중 1건 이상이 우발적 범죄라고 한다. 정말 ‘욱’하는 대한민국이다. 우발적 범죄는 순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저지르기 때문에 미리 예방하기 쉽지 않다.
지금 상대방의 감정이 불안합니다.
위험하오니 한 걸음 물러나 주세요.
감정도 예고가 있다면 잔혹한 범죄가 줄어들 수 있을까. 그 감정의 위험도를 미리 알고 올라탈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면 피의자들의 단골 멘트인 우발적인 범행을 아주 조금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저지르는 우발적인 범죄로 인해 많은 국민들은 불쾌감과 분노를 느끼지만 누구도 그 감정을 책임져 줄 수 없다. 불안감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
하루 종일 특별한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며칠 만에 열기가 식어 청원수의 증가가 더디게 오르고 있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죄인처럼 느껴졌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괜한 책임감이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변에 국민청원을 부탁하는 일뿐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평소 자주 연락하지 않던 사람들에게까지 부탁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로서, 같은 여자로서, 한마음으로 참여해주고 주변에 알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은 따뜻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기도 하다.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한 단체 카톡방에서는 나에게 이름과 얼굴을 밝히라고 했다. 이런 작은 도움마저도 도와달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해 주고 안 해 주고를 결정하는 건지 씁쓸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부탁한 나의 행동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감정싸움에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했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도 나도 딱 한 걸음만 잠시 물러나서 욱하는 순간을 넘길 수 있다면 억울한 감정의 피해자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