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로 살면, 낯선 공간에 가서 자기 소개할 일이 왕왕 있다. 정체성을 밝히고 상대방과 친근함을 어떻게 유도하는지에 따라 그날 수업 성패에 영향을 끼치곤 한다. 최근 들어 나를 소개할 때 ‘운동하는 사람’‘매일 10km 뛰는 사람’‘달리는 여자입니다’를 돌려가며 사용한다. 운동이 가장 귀찮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망설임 하나 없이 나를 운동하며 삶을 느끼는 사람으로 알아주길 바란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갈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도 덧붙인다. 성인 이후의 내 모습은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할 때 행복한지 그리고 그 활동이 자신에게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알게 될 때 형성된다.
생활운동인으로 자청하는 나를 나 자신, 가족, 친지들은 받아들이는데 거부반응이 일었었다. 달리기에 빠져 몇 달을 어두운 새벽에 나가는 나의 동력을 남편은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오해했을 정도다. 정말 어이없게도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운동복 그 자체를 입은 나를 두고 땀 흘리고 누군가를 만날 거라 의심하는 그의 창의력에 질려했었다. 그의 의심은 뭔가 꾸준히 하는 걸 본 적이 없던 아내가 계속해서 길 위를 달린다는 사실을 받아들기보다 외도를 생각하는 편이 더 쉬워서였을 거다. 결국 남편과 아이들은 운동 시작한 지 반년이 돼서야 내가 없으면 달리기를 갔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친정아버지는 몇 달 만에 친정에 와서도 그전에는 늘어져 잠만 자던 딸이 새벽같이 일어나 달리기를 간다는 사실에 놀라 왜 그러는지 추궁하듯 물었고, 시어른들은 나이 들어 살 빼려고 안간힘을 쓰면 늙어서 고생한다고 에둘러 말리셨다. 특히 시어머니는 “다시 시집갈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외모를 중히 생각허냐. 지금도 이쁘구먼.”라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보태셨다.(칭찬을 섞으셨지만, 이거 뜯어보면 타격감이 있는 언사입니다. 어머님) 아니 내가 운동을 좀 하고 산다는데, 또 운동하고 사니 정말 행복하다는데 다들 이렇게 말일 일인가 싶었다.
이런 일은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같은 동네에서 15년 이상을 살다 보니,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이웃 주민들인데 그들은 내가 러닝, 웨이트, 필라테스를 하며 일도 한다는 사실에 극명하게 나뉘는 반응을 보였다.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살면 안 힘드냐며 동정하는 사람들이다. 지지자들은 내 생활패턴과 운동을 시작한 계기와 운동하기 적당한 장소등을 캐물어간다. 아이들의 학원 정보를 물어볼 때만큼 사뭇 진지한 그들의 표정에 나는 내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알려준다. 또 동정자들은 애써 나를 외면하거나 현실부정한다. 그렇게 운동하고 관리하면 행복하지가 않잖아. 애들 한창 바쁠 때 신경 써 줘야지 엄마가 그렇게 밖으로 돌아서 가정이 제대로 돌아가?라고 기어이 우리 집 살림살이까지 걱정하고 간다.
“선우야 잘 지내? 나 너한테 자랑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다아~”
몇 개월 만에 연락이 닿은 동네 지인이다. 딸아이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한데, 우리 세대 학부모들은 ‘00 엄마’와 자기 이름을 혼용해서 부른다. 그중 J언니는 아이들의 성별이 딸, 아들로 아이들을 알뜰히 살피기로 동네에 이름이 자자했다. 간호사가 전직이었던 언니는 항공사 기장인 남편과 미술 하는 딸, 과학영재 아들을 시간대별로 라이드 하는 사람이었다. 코로나로 왕래가 드문해 지고, 일 년 만에 동네 마트에서 만난 언니는 갱년기라 그런지 계속 살이 찐다며 고민을 했었다.
나는 내가 하는 운동, 식단 등을 간략히 얘기하고, 지속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달리는 여자’‘운동하는 여자’로 정체성이 바뀐 지 3년이지만, 했다가 실패한 사례와 어떤 패턴이 좋은지 노하우를 짧게나마 나누었다. 언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듣더니 ‘그래 결심했어!’하는 표정으로 헤어졌다. 그렇게 그 만남을 잊고 있었는데 몇 달 만에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지금 유산소 운동을 시작한 것과 자신이 식단을 구성해서 진행한 이야기, 그리고 그러면서 생기는 변화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동 중 지하철에서 언니의 이야기를 간간히 호응만 하고 듣던 나는 차마 전화를 끊지 못하고 그녀의 흥분감을 전율하며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그녀의 변화가 나의 정체성에 이자로 붙는 기분이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는 행동은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동기가 될 때의 흥분,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낳는다. 서로가 좋은 영향을 끼치며 변화시킬 때 우리 삶은 좀 더 나은 쪽을 향하게 된다. J언니는 동네 마트에서의 짧은 만남에서도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그걸 해볼까 마음이 동했다. 즉 나를 신뢰하는 마음과 비슷한 삶을 추구해보는 걸로 내 삶을 지지해 준 거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었었다.
한편 내가 하는 운동을 묵살하듯 ‘그렇게 운동하면 늙어’ ‘시간이 많나 봐’ ‘살림할 시간도 없는데 집안일 팽개치고 그럴 일은 아니다’라고 부정하던 사람도 있었다. K언니는 오십 대 이후 자기 몸에 군살이 붙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내게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피곤하지 않냐, 너 그렇게 살다 골로 간다며 악언에 가까운 조언을 했었다. 그런가요 하고 슬쩍 부정도 긍정도 아닌 조건반사적 대응을 하고 만남을 멀리하다 이제는 K언니가 속해 있는 모임에서 완전히 나왔다. 단체톡에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그래도 00님이 대화방에서 나갔습니다의 메세지만 남는 뒷모습은 아름다울 리가 없다. 아름다운 이별은 김종서의 노래에나 있는 판타지다) 탈출했다.
나는 그녀의 삶을 바꾸려 든게 아니다. 한편 그녀가 편안하게 지금처럼 군살을 타박하며 지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게 불편하다면 관리해야 하지 않나? 라는 의구심이 들 뿐이다. 다이어트는 관리의 영역이고 또 가시적인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보이는 효율만점의 활동이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 그 단순한 이치는 누구나 알지만 다들 성공하는 게 아닌 이유는 '지켜내기가 어려워서'이다. 단지 반대를 위한 그녀의 말과 행동을 견디며 내 삶을 부정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행복감을 느끼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달리기와 운동을 하며 세상과 내가 맺는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다. 운동이라고 시작했지만 나를 이루고 표현하는 구체적 지표와 같다고 생각한다. 애써 과장할 필요도 없고 또한 스스로를 다그치듯 목표화, 정량해해서 몰아세울 필요도 없으며, 후회와 연민으로 나를 속일 필요도 없다. 나는 지금 오늘의 운동을 하고 그걸로 내 삶을 이뤄가고 있다. 그걸 같이 할 필요도 없지만 방해하는 사람을 참을 필요도 없다. 나는 촘촘하게 내가 하고 싶은 목표를 이뤄가며 내 갈길을 향할 뿐이다. 내 길은 내가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