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는 전지적 남편 시점
아내를 만난 건 늦게 군대 가서 그렇게도 꼬박 기다렸다 달려 나온 휴가였습니다. 몇 달 전까지 학생운동하느라 집보다 더 많은 시간 머물렀던 학과 사무실이었지요. 겨울 입대, 훈련소 마치고 봄이 되려는 무렵, 첫 휴가를 나오는데 그렇게 학교가 가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짧은 머리가 어색하지만 모자를 둘러쓰고 학과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아내를 처음에 여자로 본 건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가 없죠. 저는 93학번에 재수, 제 밑으로 94,95들도 제게 감히 형이라 부르는 못하는 호랑이 선배였답니다. 지금은 그런 끈끈한 선후배 관계는 없지만, 제가 아이들 기합도 곧잘 시키는 무서운 사람이었다니까요. 하지만 돌아서서 아이들 고민이나 집안 사정 챙겨 듣는 그런 다정함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학과 사무실에 96학번 새내기라고 아이들이 와있더군요. 아직 고등학생 티가 역력한 풋내기 애들이었어요. 그 사이에 좀 까맣고 오동통하고, 머리는 홍곰보의 단발을 한 아이를 만났지요. 사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요.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큼의 외모이거나 오랜 시간 함께 하지 않았거든요. 아무튼 훗날 아내가 우리가 그때 만났다 기억해 줘서 그게 우리 커플의 시작이구나 하고 여겼지요.
아내와 남녀 사이의 연애를 시작한 건 제대도 한 제가 대학 생활을 사회 취업하기 위해 학점벌레로 살았던 시기입니다. 그 애도 졸업반, 저도 졸업반 오빠 동생 하다가 그렇게 사귀게 되었죠. 아내는 착했어요. 제가 하라는 대로 곧잘 맞춰줬고요. 귀가시간, 음주에 대한 통제, 인간관계 등등에 대한 제재도 곧잘 듣더라고요. 아마 싸우기 싫어서였겠지만 그것 또한 제 매력 아니겠습니까? 제가 또 사랑에 진심인 남자이거든요.
졸업 전 취직하게 돼서 혼자 상경했어요. 아 참 우리는 지방 국립대 같은 과 커플입니다. 한 학년에 30명밖에 되질 않아 100여 명이 학과생활을 합니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 시국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고, 취직해야 하는 언론의 바른 정립상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기도 합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신문방송학과 애들이 뭐든 잘 이해하고 잘 만들어내요. 그래서 우리 과 출신 중에 PD, 영화감독, 기자, 정치인, 작가, 공무원, 농부까지 다양한 직군에서 일합니다. 우리끼리 친하다 보니 내부에서 CC가 자주 생기는데요. 하필 저와 아내는 사귈 때 졸업반이라 모든 학년 애들에게 존경받는 선배들이었답니다. 그 말은 우리 둘이 사귈 때부터 공개적인 커플행보는 어려운 사이랍니다. 그랬던 게 지금도 남아 있는 걸까요?
아내는 선배이자 남자친구인 저에게 참 잘했어요. 결혼 전 4년 연애했는데요. 요샛말로 롱디 커플이라고 하죠? 제가 서울에서 근무할 때는 아내가 광주에 또 아내가 서울로 취직하고서는 제가 광주에서 2년을 있던 시절이 있었어요. 우리는 3년을 그렇게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사귄 사이랍니다. 장거리여도 우리끼리 좋았던 시간이에요. 그리움만큼 서로에게 잘해주었고 또 싸울 시간 아껴서 한 번 더 서로를 마주했던 시간이거든요. 저는 아내가 예민하지 않은 게 좋았어요. 아내는 두루두루 사람들과 잘 지내요. 잘 웃고요. 또 항상 다이어트를 한다지만 결혼할 때조차 오동통한 그 몸 그 자체였어요. 머.. 저는 그런 그녀가 좋았어요. 날씬한 여자는 질색이거든요.
아내는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맞벌이로 힘들게 육아하다 임신기에 이런저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더군요. 사실 그 사이에 살은 많이 쪘어요. 그래도 귀여웠죠. 그래서 저는 아내를 '토실이' 혹은 '하마'라고 불렀어요. 귀엽지 않습니까? 귀여운 외모의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고, 나만의 애착 호칭이기도 하고요. 아내의 건강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아줌마들이 그렇게 살찌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집안일하다 또 아이들 챙기다 밥은 대충 먹지, 또 애들 재우고 그제야 허겁지겁 먹으니 살이 안 찔 수가 없죠. 다 이해해요 이해한다고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나의 '토실이'가 달라졌어요. 그녀가 살을 빼고 싶다고 하길래. '너는 못 빼. 왜냐 내가 너의 뚱뚱함을 좋아하거든'이라 위로해 줬어요. 아니, 아이들 돌보느라 시간 내기 쉽지 않을 텐데 거기서 운동까지 한다고 하면 아내가 너무 피곤하지 않겠나요? 살 빼기가 어디 쉽나요? 되지 않을 것에 희망을 갖는 건 고문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제가 괜찮다는데 아내 표정이 좀 이상하더군요.
아내는 독기 어린 표정이더니만 그 후로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러 가요. 주말에 깨우지 않으면 10시, 11시까지도 잠자던 그녀가 새벽같이 일어나 달리기를 하러 간데요. 제가 그녀를 안 지 20년인데, 거의 뛰는 걸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매일같이 뛰러 나가요. 또 뛰는 복장은 그게 또 뭔가요? 레깅스에 까만 쫄티. 허리에는 형광색 복대를 하더라고요. 너무 이상해. 누가 볼까 봐 너무 이상해요. 얼마 안돼서 멈출 거라 생각하고 말리진 않았어요. 그녀 패턴에 금세 지칠 텐데 부딪칠 필요 있나요. 그냥 그러다 말겠지 싶었던 게 3년이 되었네요.
더 잘 뛰려고 헬스장을 다니겠대요. PT를 받겠대요.
그리고 식단조절을 하기 시작했어요. 왜 자꾸 샐러드만 먹는 거죠? 그리고 우리 가족 외식메뉴도 자신에게 적합한 메뉴가 아니면 안 먹고 집에 와서 다시 샐러드를 먹는 거예요. 내가 알던 그녀는 어디 간 거죠?
올해는 애들이 둘 다 고등학생이라 아침에 손이 많이 가거든요. 애들이 밤에 늦게 잠들어서 수면이 태 부족할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이 여자가 더 일찍 나갑니다. 애들 밥 챙기기 전 컴컴한 새벽에 나가서 땀을 펄펄 흘리고 와요. 왜 이러는 거죠? 이 여자 어디 다른 것에 빠진 거 맞죠? 저와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 생겼을까요? 이렇게 이 여자를 조정하는 게 뭘까요? 저는 도대체 모르겠어요..
그녀에게 물었어요.
사람이 생긴 거냐고. 누굴 만나러 가느냐고.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또 나갑니다. 달리는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있대요. 이게 무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