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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 작가 Jun 01. 2023

너네랑 함께하려고 ‘온갖 것’들을 뛰어넘어 달려왔어


달리기 정모가 있는 저녁 시간은 하루가 너무 바쁘다. 세상의 중심이 그것을 위해 돌아가는 듯 아침에 모든 걸 다 계획한다. 아이 둘의 저녁 식사와 청소까지 마치고 제시간 안에 가려면 오늘 오후에 딴짓할 시간이 없다. 둘 다 고등학생이어도 여전히 집에 오면 밥 달라고 입을 짹짹 댄다. 그러니 배고픈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집에서도 나는 시간에 쫓겨 달리고 있다.  달리려고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달릴 일인가? 질문하지만 그럴 일이다.

      

정모 시간은 저녁 8시, 약속장소인 경복궁까지 도착하려면, 집에서 한 시간의 여유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 다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나는 직장인들과 반대 방향으로 그들의 근무처를 향해간다.  반대편 지하철 라인과 달리 한산한 지하철 칸에서 내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건가를 생각한다. 잠시 뒤 8시 세종문화회관 앞 세종대왕동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도착해 있다는 카카오톡이 시끄럽다.     


일주일에 3번 러닝 크루 모임이 있다. 아침에 혼자 뛸 시간도 겨우 확보하는 마당에 저녁에 정모까지는 무리임을 나도 안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안 뛸 코스라서 여럿이 할 때 끼어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귀가해 배고프고 성난 가족들에게 ‘먹잇감’ 던져주듯 부리나케 저녁을 챙겨준 후에 날 듯이 한걸음에 뛰어왔다. 또 뛰기 위해. 

     

여러 사람과 모여 뛰려면 아무래도 품이 더 든다. 이동거리와 시간을 감안해야 하고, 또 주행시간까지 생각하자면 1시간여 뛰기 위해 3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집 근처를 그냥 뛰었다면 이미 샤워하고 머리 말리며 맥주도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인 거다. 또 시내를 뛰러 나올 때 복장 문제도 신경 쓰인다. 달리기 편한 옷과 러닝화를 신고 양복과 정장 입은 사람들 속에 파묻힐 때 무심한 듯 훑는 시선을 무시하기 어렵다.  새로 장만한 러닝화는 왜 이렇게도 화려한 형광색인건지... 무채색 사람 무리 중에서 내 발만 통통 튀어 보인다.   

아디다스 울트라부스트를 4개 갈아치운 뒤 정착한 호카 로켓 

지난번 정모에서 만나 안면을 튼 ‘월드스타’님과 눈인사를 나눈다. 러닝 크루에서 나는 제법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데, 이 그룹은 기혼자도 많지 않다. 그중 비슷한 연령대의 월드스타님은 수줍어 혼자 쭈빗거리던 내게 먼저 다가와 이야기 건네주었다. 이곳에서는 나는 ‘샐리’, 요술공주이자 라인의 노랑 오리와 동명으로 불린다. 러너로서의 부캐의 삶이 지금 시작된다.     


간단히 몸을 풀고 페이스별로 그룹을 나누어 경복궁을 서서히 돌기 시작한다. 오늘의 페이스는 6.30m/km 육삼공이라 불리는 이 페이스 1킬로미터를 뛰는 데 걸리는 시간이 6분 30초 걸린다는 이야기이다. 경복궁 둘레를 돌면 한 바퀴 돌면 2.5km 정도인데, 요새는 야간개장을 했고, 외국인관광객들이 늘어 특히 조심해야 한다. 나 건강하자고 뛰다가 다른 사람과 충돌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 정모에서는 경복궁을 2바퀴 돌고 북촌을 올라가서 야경을 보고 내려오기로 한다.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15분 내외인데, 그 정도 뛰고 나면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기 시작한다. 2바퀴부터는 약간 흥이 난다. 페이서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대중가요에 떼창을 해보기도 하고 DSR카메라를 들고뛰는 430을 뛰는 날쌘돌이 포토님들에게 자연스레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옆의 친구가 토끼머리띠를 빌려주었다. 이걸 쓰고 달리는 사람을 보면 인사해주세요  하이 샐리!

이 그룹은 참 이상하다. 별 거 없이 서울 시내를 시간과 장소를 약속해 뛰기만 하는데, 총인원이 90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은 직장인이고 이 모임에 오기 위해 하루를 러닝으로 마감하기 위해 오후에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달려온 사람들이다. 매주 3회 이상을 정기적으로 뛰고, 이후 뒤풀이로 친교를 다진다. 육아와 가사에서 해방되지 않은 나로서는 뒤풀이를 참석하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소원하지는 않다.      


크루들에게 많이 배운다. 사진 찍는(찍히는) 법, 러닝 장비와 대회 훈련법, 서울 시내 달리기 좋은 길, 혹은 시티런 후 가기 좋은 뒤풀이 장소까지, 인스타 피드 혹은 러닝 하는 인생들의 속삭임까지 흡수하듯 배우는 중이다. 살면서 이렇듯 무해한 모임을 또 경험하게 되다니, 나는 참 복도 많다. 또 가끔 그들에게 듣는 언어로 아이들 앞에서 내비치면 아이들이 나를 젊은 엄마라 여겨준다.      


40살이 넘어서 맺은 인간관계는 운동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으로 집약된다. 아이들 친구 엄마 모임, 혹은 사교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에 내가 받고 싶은 자극은 운동과 책 속에 대부분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임 아니고서는 그냥 혼자 머물고 싶다. 함께 땀 흘리는 사람들의 우정은 굉장히 단순하다. 동일 시간, 같은 장소에서 머무르는 사람의 추억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그들 모임에 참석코자 만사를 제치고 달려온 게다.      


달리기 정모 이후 집으로 귀가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아이들은 학원으로 남편은 운동하러 나가 아무도 집에 없을 시간에 충만해져 들어간다. 나의 에너지는 함께 운동하여 다시 채워졌다. 달달한 달리기 시간으로 행복해졌다. 뒤풀이 사진으로 크루방이 시끄럽지만, 나는 조용한 내 공간에서 집안일을 달린다. 남편은 왜 그렇게 집을 두고 밖으로 도느냐고 투덜대지만, 또 이런 나만의 구석이 있어야 가족 그대들에게 즐겁게 대할 수 있노라 자부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부캐는 '샐리' 다. 요술공주처럼 날아 그대들과 달리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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