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발로 불안을 잠재우는 자본주의자 러너

대회준비하는 마음이 부족할 때 나는 지네가 된다.

by 달리는 작가

러너에게 필요한 신발은 몇 개일까?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정답은 가장 어리석지만 이해 타당한 말이기도 하다. 대규모 공장에서 제작한 제품들에 개개인의 발 모양에 맞춰 나올리는 만무하니 여러 브랜드의 제품군을 다양하게 겪어 보아야 내 발이 가장 편안하고 속도 낼 때 무리가 덜 가는 신발을 만날 수 있다. 마라톤의 시작이 서구였으니 대개의 유명한 러닝화의 발굴과 개발은 유력 해외브랜드에서 시작되었다.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 아식스, 브룩스, 퓨마, 온러닝, 등등 유명 스포츠브랜드들의 신발들이 동양인의 발모양에 맞추어 연구하고 제품을 출시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개인의 욕구가 중요시되며, 자기 발 모양에 대해 연구하고 최적화된 신발을 고르려는 노력이 SNS에서 회자되는 러닝화 계급도를 만들었고 마라톤 대회에서 고인 물러너에서 러닝 입문자를 구별할 수 있는 복장특색을 자아냈다. 러너들은 1분 1초의 자신의 기록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좋은 장비를 구비하고 스포츠 용품 회사들은 그에 맞추어 새 제품을 연구개발하여 매해보다 기능을 강화하고 또 가격도 올린 러닝화를 출시하기에 바쁘다. 솔직한 말로 '영포티' (자신의 전성기에 유행했던 브랜드의 고가 라인을 상비하며 자본력과 소유욕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중년)라 긁히고 조롱당할지라도 실력을 돈으로 살 수만 있다면 아저씨의 원빈처럼 "얼마면 돼?을마믄 되냐그" 소리치며 물건들을 사들이고 싶을 뿐이다.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의 초심과는 영 다른 모습인 게 탈이지만.


여러 운동이 있지만 비교적 러닝이 입문하기 쉬운 이유는 장비를 구비해야 할 허들이 낮기 때문이다. 구두 없는 사람은 봤지만 운동화 없는 사람은 드물다. 집에서 꺾어 신던 운동화와 잠옷처럼 헐렁하게 입는 트레이닝 바지(스판기가 있다면 청바지여도 무방)만 입고 시작할 수 있는 게 '달리기'아니던가. 우리가 처음부터 비장하게 10km, 22km, 42km 달리겠다 마음먹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신호등의 잔여시간표시가 반으로 줄어들기 전 다음 신호를 얌전히 기다리기보다 4 ~5초 안에 8차선 도로를 건너는 '소심하지만 확실한 승리감'의 유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가. 또 요즘 인스타나 연예계 뉴스에서 러닝을 했더니 살이 확실히 빠지더란 소식은 정말 흔하게 전해들어 밖을 향하게 만들지 않았나.



무엇을 하려거든, 혹은 잘하고 싶거든 '체력'을 길러야 하고 당장 시작해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러닝'이라는 인식에 '작심삼일'지라도 오늘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 그게 바로 가장 원초적인 자아실현이 욕구가 아닐까? 그런데 러너들은 왜 신발과 장비를 자꾸 사들일까? 운동화를 몇 개씩 그것도 훈련 내용에 따라 왜 그리도 다양한 신발을 여러 개 구비해 놓고 살까? 러너 5년 차인 내가 볼 때 그건 바로 인생에서 우리가 뭔가 저지르는 욕구의 기본 형태인 '불안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마라톤 준비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연습 시간'이다. 나는 마라톤을 시작한 이래 부모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내가 나가는 대회와 나의 기록, 운동량까지 한때 우리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언급되는 화제이기도 했는데, 결혼과 육아 이후 남편과 아이들에게 쏠렸던 관심이 내게 돌아오는 과정이 신기하고 때로는 뿌듯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운동을 싫어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통했는데, 사춘기에 돌입하며 커진 몸이 대학교 입학 때까지 꾸준히 유지되어 160cm의 표준키에 60에서 70kg로 비만이 굳어지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하고 절식으로 다이어트에 돌입, 1학년 말에는 55kg이 되었지만 미국어학연수시절 다시 68kg, 결혼 전 57kg에서 출산 후 72kg까지 1년 사이 15kg을 빼고 찌우는 또 빼고 또 찌우는 요요를 반복하고 있었다.


러닝은 내가 상당시간 공을 들여 건강한 식단으로 관리하고 근력운동을 2년 넘게 한 뒤 추가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당시 나는 바디프로필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3주간 마지막 선명한 근육라인을 그리고 싶은 동기가 있었고, 공복유산소로 달리기를 하면 가장 효율이 좋다는 말에 무더운 8월의 아침에 1km 달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큰 무리 없이 몇 년을 해왔고 러닝이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가 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얻은 듯 훈련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대회에서의 느끼는 풍경까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축이 된 거다. 그런 나에게도 역시 러닝의 오작동이 생겼으니 바로 그게 '장비발'이었다.


대회를 나가면서 고가의 장비를 소위 말하듯 '지른다'. 그 시간에 연습을 더하거나 스트레칭에 신경을 쓰면 좋으련만 어떤 선수 혹은 친한 러닝 친구가 권한 러닝화를 쇼핑몰에서 골라 디자인과 가격을 고르며 비교하고 쿠폰을 얻으려 여기저기 우회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어떤 브랜드의 제품라인이 출시되는 시간에 맞추어 줄을 서서 기다려본 적도 있다. 연예인 빠순이도 하지 않았고, 또래친구들이 사는 명품백도 없는 내가 변했다. 꾸준한 연습이 지금의 기록에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을 쉽게 저버리고 장비를 구매하는 행위로 불안감을 해소하려 든다. 마치 일타강사의 강의를 들으면 서울대 합격의 입구에 서있을 거라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구두보다 레이싱화를 지네발 갯수처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러너들은 다리는 2개이되, 신발수로 보면 거의 '거미'나 '다족류 생물'처럼 같은 브랜드의 여러 라인 신발, 혹은 다른 브랜드의 유사기능군에 속하는 신발들을 사들이게 된다. 불안감에 이어 좋은 신발을 사들이는 나의 마음에는 '소유욕'도 있었다. 살 빼기 좋은 운동이라는 이유 외에도 러닝은 계절감과 기분의 변화, 그리고 마음과 근육을 단련시켜 주는데 가장 좋은 수련의 일종이었다. 하루 게을리하면 이삼일은 집안에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던 예전의 습성이 도발되었고, 만나는 러너들 사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록 경쟁이 자꾸 나를 움츠리게 하고 한편으로 오만하게도 만들었다.


결국 대회를 앞두고, 혹은 대회에서 원하던 결과에 못 미치면 나는 장비를 구비하는 것으로 달랬다. 취미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쓸 줄 알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을 이미 조깅용, 비나 눈이 오는 날 신을 용도, 그리고 대회에서 기량을 마음껏 뽐내려 들 때 신는 것과 심한 훈련이나 대회 다음 회복을 위한 신발까지 신발을 사고 또 사들였다. 신발 개수로 본다면 나는 '지네'를 능가 했다. 어떤 때는 세일을 한다는 이유로 이름만 들어봤던 신발을 구매하기도 했는데 지금 당장 꺼내놓기에는 신발장이 너무 협소해 아이들과 남편의 손이 가장 잘 닿지 않는 식기류를 보관하는 부엌상부장에 숨겨두기도 했다.


올해는 좀 다르다.11월과 12월의 최다할인구간을 용케 버텨오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어 '어, 이제 좀 뛰어진다.' 했던 때의 페이스로 연습에 들어갔다. 그때와 속도는 비슷하지만 달리는 양은 훨씬 줄였고 대신 리커버리나 근력강화를 위한 연습을 추가했다. 가자미근이나 햄스트링 부상 예방을 위해 너무 싫어하는 '런지'나 '스텝박스'점핑, 스킵 훈련을 슬슬 마일리지나 채우려는 마음을 붙들고 한다. 연습해야 할 시간이 부족하니 온라인 쇼핑은 자연스레 줄었고 지금의 내상태나 운동량을 기록하는 재미를 붙였다. 그렇다. 러닝이 결과만 보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과정까지 살피는 동기화의 확산임을 다시 배워본다. 잘 참았다. 이제 12월 내 생일에 맞춰 발급된 생일 축하 쿠폰 사용하려 들지 않으면 된다. 나는 이길 수 있다. 나의 불안에서 비롯된 쇼핑욕 따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으리라. 건투를 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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