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변명 > 니키사와 미와, 무소의 뿔
한해가 저무는 이 때, 연초에 계획했으나 내가 못이룬 일들을 고스란히 새로운 다이어리로 옮긴다. 겨울이라 더욱 달콤하게 들리는 발라드 음악을 들으며 약간은 센치하게 조금은 비장하게 임한다. 아직 한해가 며칠 남았으니 한두개 정도는 시도해 볼 법도 한데 새로 받은 365일을 알차게 보내겠노라 미루어진 결심을 세운다. 맥주와 감자칩을 씹으며 적는 몇년간의 부동의 목표는 '다이어트'다. 내년에는 군살을 5kg만 빼야지 하며 호호록 맥주를 목에 넘긴다. 지금 냉장고에 든 맥주가 떨어지면 다시 더 사다주지 않으리라 결심도 했다.
인간은 은연중에 해피엔딩을 꿈꾸도록 진화한걸까? 우리의 유전인자들은 후회와 회한을 딛고 발전을 꿈꾸도록 설계되었다. 지금까지의 문명발전을 이런식으로 설명된다. 단 돌연변이도 있는 법, 뒤늦게 후회를 하거나 그것조차도 미뤄둔은 사람들이 있다. 기회가 있을 때는 그저 흘려 보내고 뒤늦게서야 그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 문학과 예술가 그 공허함을 채운다. 아내가 죽은 뒤에야 그녀를 사랑했음을 비로소 깨닫는 '사치오'처럼 말이다. 소설 <아주 긴 변명>과 동명의 영화에서 인기있는 소설가로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언어로 먹고 살며 인기를 얻었으되 정작 자신의 말이 쓸모가 없어졌음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소설 『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무소의 뿔, 2017)은 작가이자 영화 감독인 니시카와 미와 특유의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책은 제153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며, 2016년당시 전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나시카와 미와는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 밑에서 영화를 시작한걸로 알려졌다) 동명의 영화를 직접 감독했고 당시 여러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두 작품『아주 긴 변명』은 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과거의 자신에게 남기는 고백이며,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으며 살아가지는 않을 내일의 자신을 향한 다짐의 언어다.
유명작가인 사치오는 갑작스런 사고로 아내 나쓰코를 잃게 된다. 아내는 오랜 친구와 함께 스키 여행을 가던 차 버스가 얼어붙은 호수로 떨어지면서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떠난다. 그 친구의 남편, 오미야 요이치는 앞으로 혼자서 열한 살 신페이와 네 살 아카리를 키우게 된다. 아내들의 죽음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치오와 요이치 가족은 만나게 된다. 그 날, 사치오는 이유도 모른 채 요이치의 두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이 전과는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
두 작품에서 기누가사 사치오의 이름은 아주 주요한 소재다. 사치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싫어한다. 그는 “특출한 사람과 이름이 같은 탓에, 혹시 비슷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닐까”(p.14) 기대 받는 것이 싫었고 자신은 그 이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는 작가로 데뷔하면서 “쓰무라 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아주 친근한 상대에게조차 자신의 본명을 밝”(p.16)히지 않는다.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들 중에 늘 변함없는 거리감으로 그를 대하는 사람은 아내 나쓰코 밖에 없었다. 나쓰코의 사고 뒤에는 오미야 가족들이 그를 ‘사치오 상’으로 불러주고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찾게 되는 듯하다.
이는 사치오가 사랑을 늘 이야기했으되 표면적으로 작품안에서의 소재로만 다루던 직업인에서 요이치 가족을 만나며 자신안에 사랑이, 감정이 잠재워졌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 사랑한다 말할 나쓰코는 세상에 없는데, 지금에서야 그녀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알게되는 남자. 나쓰코는 대학에서 중퇴하고 미용사로 전향하며 남편이 작가로 성공하기까지 10년 동안 그를 부양했었다. 그녀는 사치오가 “거짓말을 하는 자각조차 없는 거짓말쟁이”(p.26)라고 생각한다. 사치오가 성공한 작가 쓰무라 케이가 되어갈수록 나쓰코는 “안도를 얻은 대신 자신이 사는 의미”(p.31)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대학졸업반 시절 취업 준비를 위한 머리를 하러 온 사치오를 그녀는 단박에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는데, 그는 그녀의 이름을 좀체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녀가 머리를 감겨주는 손길이 좋아 펌까지 하면서도 그녀가 직접 알려주어서야 이름을 알아낸다.
이름에 대한 이 두 사람의 상반된 입장은 둘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나쓰코가 기누가사는 자신의 본명을 싫어하고 ‘허업종사자’인 작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기누가사가 성공한 작가가 되기까지 그를 부양하면서도 자신이 “사는 의미”를 느꼈다는 나쓰코는 사실 그의 성공을 “시샘”(p.30)하고 있다. 그의 삶의 과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쓰코는 그것을 꿰뚫어 보듯 그가 싫어하는데도 본명으로 그를 부른다. 이름을 두고 부부가 나누는 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침묵”(p.42)이 되고, 이어 그들은 나쓰코의 생존에 나누는 마지막 인사로 영원히 헤어진다.
책은 주인공 기누가사의 1인칭 시점과 그의 주변에서 주인공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3인칭 주변인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끌고 간다. 특히 소설 초반부에 기술되는 나쓰코와 애인 오미야 요이치, 그리고 후반부의 방송국 관계자 지누시 아키코와 편집자 구와나 고이치로가 보는 기누가사의 모습은 독자에게 그를 보다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중 오미야는 나쓰코의 사고가 있던 날, 기누가사의 집에서 그와 외도를 나누는 상대인데 그녀는 “사모님의 헌신이 무덤을 팠”(p.45)으며, “10년 넘게 밥 얻어먹은” 기누가사가 수치심을 느꼈고 이제 사모님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p.47)고 말하므로 그들의 실체를 밝힌다.
영화는 두 아역배우의 호연으로 상투적인 재난 영화의 문법을 파괴하고 있다. 대개의 재난 영화에서 재난은 잔잔한 일상을 비추는 전개가 흐르고 후반부에 주인공처럼 등장하여 엄청난 스케일과 음향, 시각적 효과를 통해 삶을 파괴하는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초반부에 나쓰코의 사고와 두 여자의 부재라는 ‘재난’
은 극중 TV뉴스보도를 통해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다. 즉 재난 또한 특별한, 그래서 사람들을 완전히 뒤흔들어 파괴성을 지닌 특별함이 아니라 우리 삶에 어느 순간 다가온 희열 반대의 상실의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사치오가 하고 있는 "아주 긴 변명"은 수취인이 없는 독백의 편지, "삶 전체로 펼쳐내야 하는 긴 해명"인 거다.
재난은 잔인하지만 삶의 전체를 다 파괴하지는 않는다. 그 후 그 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함을 견디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 유족들의 담담한 삶으로 남게 되니 말이다. 사치오가 요이치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요이치와의 어색한 침묵,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며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은 ‘참담한 일을 당했지만 그걸 극복해냈다.’로 증명되는게 아니다. 그저 인간은 '살고 있으니, 살아라'조로 견디며 살기도 한다.
두 작품은 요약하자면, 한 남자의 긴 변명이 담긴 편지, 즉 자신을 돌아보는 해명으로 볼 수 있다. 수취인이 그걸 전해들을 수 있을지 여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p.323)고 말한다. 그녀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제 사랑하지 않아. 털끝만큼도”(p.213)라는 메시지는 기누가사에게 너무 늦게 도착했다. 나쓰코에게 변명하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그녀가 죽어버렸고, 사치오는 신페이나 아카리를 위해 “포기하면 안된다”(p.325)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는 없는 나쓰코가 자신에게 “포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 사람’(p.325)임을 되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지 중요하지 않은 일은 아닌 거다.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하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런 건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누구에게든 필요해. 살아가기 위해, 마음에 두고두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군. 타자가 없는 곳에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생은 타자라고.( p325)
니시카와 미와는 절묘한 제목으로 독자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또 불시에 닥치는 재난 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 묘사를 다양한 시점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준다. 제목처럼 기누가사의 변명은 아주 길다. 그 긴 과정을 그가 혼자 독백하고 있지만 그가 뱉는 말을 듣는 우리는 지루하고도 구차한 자기연민 또한 그를 살게 하는 힘이 됨을 목격한다.
살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일들은 '희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도 삶을 살게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만 지속되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에 대한 마음을 알게되는 순간 절실한 것처럼 우리는 희열보다는 애도와 상실에서 뜻밖의 동기를 찾아낸다. 얼마남지 않은 2025년의 밤, 새해 얼마간은 먹지 못할 맥주의 맛처럼 한계점을 느끼는 순간 그것이 더욱 맛깔나게 느껴지는 지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