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을 바라지 않는 본질적 러닝
알고리즘은 나를 미치게 한다. 오늘 내가 뛰어야 하는 적정 거리가 있고 나만의 페이스가 있지만 타인의 인증은 나를 몰아세운다.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에게 알고리즘은 쥐약이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세뇌와 아직도 안 하고 뭘 하느냐는 자책으로, 숨을 헐떡이며 뛰고 있는 순간에도 나를 봐줄 사람들을 의식하며 발을 옮긴다. 고유한 사람인게 좋아서 뛰었는데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무리인지도 모르고 계속 밖을 향한다.
나이가 무기는 아니지만 평균지표로 염두에 둘 대상이긴 하다. 신체 변화가 큰 사춘기와 갱년기, 또 여성으로 맞이하는 주기성에 내 운동스케줄을 정하는 게 옳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타인이 오늘 운동한 기록과 그 성과에 대한 뿌듯함을 말하는 걸 보면 집에 있는 나 스스로가 초라하게 보인다.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불나방처럼 타인의 자랑에 나는 불안이라는 심리를 의지라는 말로 바꾸어 썼다. 결국 피로에도 불구하고 밖을 향해 좀 더 멀리 보다 빠르게 뛰게 만든다.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점점 더 몸이 안 좋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어쩌면 나처럼 나 자신과의 대화는 멀리하고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을지 모른다.
그게 부상과 대회 후유증을 남기는지도 모르고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다 왜 그것을 하고 싶었는지도 잊고 사는 대다수의 자기 계발형 과제처럼 되기 십상이다. 달리면서 느꼈던 순수한 기쁨, 엔도르핀이 분비되며 느끼는 본연의 충만함을 느끼려 시작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치킨을 먹었다는 이유로 혹은 마일리지를 채우고 싶어서 대회기록을 경신하기 위해서 뛰는 사람으로 살았다. 목표치를 채우려는 욕심에 다리 피로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뛰다가 신체조건이 다른 타인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애초에 체급이 다른 상대와 붙으려 했던 나 자신의 패착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병원에 고가의 치료비를 지불한 뒤다.
달리기의 보상은 순순한 희열이었음을 다시 깨달아야 한다. 영리하고 계획적인 태도는 러닝에서도 요구된다. 그래서 러닝은 정신수양의 일종이라 봐도 무방하다. 나 자신과의 지속적인 연결을 추구해야 하는 과정이니까. 오르막길을 오를 때의 발놀림, 내리막길을 맞이할 때의 발바닥 착지, 장거리의 느슨함과 단거리의 스퍼트까지 다리가 움직인다 생각하지만 머리는 지형지물을 관찰하고 그에 맞는 준비자세를 취할 수 있게 계산해야 한다. 그냥 산책처럼 하는 조깅도 필요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나를 향상하려는 욕구는 늘 자리하지 않던가? 그것을 시도할 때 기준을 타인에게 두지 않는 초연함 그게 필요하다는 거다.
나의 러닝은 단단하고, 타인의 실력을 따뜻하게 봐줄 수 있는 자세는 내 본연의 자질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거추장스러운 목표보다 내가 나를 잘 돌보는 마음, 지금 운동할 수 있도록 일상에 집중해 내 시간을 마련한 돌파력, 거기에 오늘 운동을 잘 한 뒤 느끼는 순수한 기쁨이 목표가 되도록 정비하는 사람이고 싶다. 도파민의 노예에서 엔도르핀의 수혜로, 두려움에서 자신감으로 비교에서 나 자신에 대한 연결로 이어지는 삶을 살고 싶다. 이 정도면 나.. 러닝 하며 철학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