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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Sep 05. 2021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선을 쓱 문지르길 택하는

백수린 소설, <여름의 빌라>

2020년 여름 사놓고 여름을 놓쳐버려서, 이듬해 여름 책의 이름과 잘 어울리는 계절에 나의 허름한 전셋집 빌라에서 읽으리라 다짐하고 고이 책장에 모셔놓은 책, <여름의 빌라>. 1년 전 결심이 무색하게 이 책을 곁에 둔지 몇 주가 되었지만 표지의 그림이나 물성이 유쾌하게 호로록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닌 것을 티 내고 있었고, 한뜻 달뜬 여름 한가운데에서 마주하기에 왜인지 겁이 났다. 쉬이 펴게 되지 않길래 또다시 선선해진 바람에 내년을 기약해야 하나 했었다.


그러다 최근 시작한 북클럽을 통해 데버라 리비의 <살림 비용>을 읽었다. 그 책의 내용과 문장 역시 좋았지만 나는 사실 그보다 살림 비용에 대한 백수린 작가의 추천사가 더 좋았고 백수린의 글을 어서 더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초가을인 게 자명한 9월, 여름의 끝을 억지로 붙잡고 오늘을 여름이라 우기며 더 늦지 않게 여름의 빌라를 읽어 내려갔다. 아 - 소설집이구나. 장편이 아니란 생각에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지만 각 수록 작품의 끝마다 여러 번 호흡을 골라야 했다.


백수린 작가의 글이나 인물들은 세심하고 조심스럽다. 호들갑을 떨지 않고 담담하다. 호들갑을 잘 떨고 소리치고 표현하는, 대범해 보이지만 가끔 그런 내 표현에 불편하거나 다치는 타인들이 있지 않을까 자책하는 나와 딴 판인 인물들이다. 작가에게 파리가 그러하듯 <<여름의 빌라>>는 나에게 ‘희붐하다’.


아파트와 달동네, 인종차별과 폭력, 똔레삽 호수와 베를린, 모범생과 청소년 미혼모, 유부녀와 불륜녀. 세상이 선을 긋고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는 하는 거대한 분류와 표기들. 백수린 작가는 입체적인 개인을 빚어내고 주인공들의 입을 빌어 조심스레, 그 선과 경계를 문질러 낸다.


소도시의 공무원 아버지 아래 자라서 태어나 처음 해본 반항이라고는 독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한 일뿐이었던 지호는 대체 언제 변한 것일까요. 턱없이 치솟는 전세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우리가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이사를 거듭하면서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호의 생각들에 대체로 동의했고 그의 선택들을 지지해왔습니다. 하지만 투쟁, 철폐, 생존, 생존. 그런 단어를 발음하는 지호의 얼굴은 어째서 그토록 쓸쓸할까요. (p.59-60)


친구들과 최근 만나며 많이 하는 얘기가 있다. 나이가 들 수록 회색 인간이 되어 간다 것. 절대적인 선과 악도 있을 수 없는 복잡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까닭이다. 어린 시절의 나라면 진절머리 칠 종류의 인간이 되어 간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싫지 않다. 여전히 날카롭고 선명한 태도와 말로 다른 사람을 베고 있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을 갖고 조금 더 백수린의 글과 같아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밟지도 어둡지도 않게 다만 더욱더 밝아질 날을 기다리며 희붐하게.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p.17)




사족1. 그나저나 이 책은 책 자체의 아름다움도 미쳤다. 녹음 위로 쏟아진 때 아닌 폭설의 본을 따 그대로 면지에 실은 듯 하다. 레이시한 면지는 전자책이 횡행하는 시절 종이 책을 선호하는 나같은 인간에게는 참지 못할 포인트이다. 한참 어린 연인의 등을 매만지듯 계속 만지게 된다. 디자이너 만세


사족2. 수록작 중 <흑설탕 캔디>는 <<나의 할머니에게>>에서 이미 접한 글인데도 다시 한 번 처음과 못지 않은 애틋함으로 읽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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