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하고 저릿한 자유의 맛
수능을 봤고, 대학생이 되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헤어 스타일을 유예하지 않아도 된다! 내 머리카락은 이제 오롯이 나만의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반쯤만 사실이란 건 이후에 알아가게 되었지만 일단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의 머리카락도 '학생 다움'을 요구받지 않는 그들의 것이 되었다. 수능과 입시의 끝을 기점으로 참아 온 모든 것을 터뜨리는 것처럼 친구들은 너 나 없이 펌을 했고,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펌을 한 상태였던 나는 두려워졌다. 가만히 있다가는 저 미친 똑같은 스타일의 펌의 물결 속에 클론을 찍어내는 컨베이어 벨트 위 클론 n 같은 모양새로 다분히 디스토피아적일 광경의 졸업식에, 대학 교정에, 갇혀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이전 글을 읽으셨다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늘 유난이었던 나는 다음 헤어스타일을 물색했다.
물론 물색이라 하여 '여자 헤어스타일 추천' '200n 년 여자 유행 헤어스타일' 따위를 검색하진 않았다. 나에게는 19년 간 차곡차곡 쌓아온 헤어스타일 위시리스트가 있었다. 다만 무엇부터 해볼지가 관건이었다. 머리가 길고, 이미 펌한 상태에서 해도 무리가 없는 머리.
그래, 결심했어! (이 대사 다음에 BGM이 머릿속에 깔렸다면 당신도 옛날 사람)
애니모션을 아시는가. 지금이야 삼성 하면 갤럭시지만, 태초에 삼성에는 애니콜이 있었으니 2005년 당시 젊은이(?)들을 타겟으로 하는 브랜딩 프로젝트가 애니모션이었다. 단순히 제품을 다른 제작사가 제작하는 드라마나 매체에 싣는 PPL과 달리, 그 당시 최고의 스타 이효리와 에릭을 주인공으로 해 뮤직비디오 자체를 제작하고, 뮤직비디오 내에서 계속해서 애니콜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기획된 이 대단했던 프로젝트는 이효리와 에릭의 춤사위와 멋짐, 그리고 지금 들어도 갓띵곡이라 일컬어지는 '애니모션'이라는 곡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중3이었던 나도 속수무책으로 이 곡과, 이효리의 멋짐에 반한 것은 물론이다. 아직 안 보셨다면 꼭 보셔라.
사실 애니모션이 뮤직비디오의 스토리라인에 굉장히 많은 모티브를 가지고 온 것 아닌가 싶었던 영화로, 애니모션 이전 개봉한 <허니(Honey, 2003)>가 있다. 제시카 알바(Jessica Alba)가 분한 주인공 '허니' 역시 프로 댄서를 꿈꾸는 걸스 힙합퍼인데, 이때 제시카 알바도 컬리(Curly) 헤어를 하고 있었다. 영화 자체의 줄기가 블랙 커뮤니티에 등장한 백인 구원자 이야기여서, 지금 다시 보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앞이마를 짚게 되긴 하지만 허니라는 캐릭터 자체의 매력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2006년 개봉한 <스텝 업 I>은 또 어떻고. 노아로 분한 제나 드완(Jenna Dewan)도 컬리 헤어를 하고 춤을 춘다.
유행이야 알 바 아니고, 댄서들의 자유로운 몸짓에 대한 동경이 있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드디어 자유롭게 할 수 있던 시기, 손과 다리가 가는 대로 음악에 몸을 맞춰 춤추는 댄서들의 머리를 하기에 대학교 1학년은 너무나도 적기였다. (당시 교정에서 유행하던 '신입생 퀸카'되는 머리는 갓 등장한 새 시술 방식의 이름을 딴 디지털 펌이었다. 좀 더 트렌디한 스타일을 추구하던 이들은 서인영 - 태민으로 대표되는 버섯 머리를 하기도 했다. 그 말은 나에게 디지털 펌과 버섯머리는 해선 안 될 머리라는 뜻이었다.)
내가 원하는 펌에는 비싼 강남의 스타일리시한 미용실이 필요 없었다. 엄마가 펌을 하던 동네 미용실이면 충분했다. 엄마의 전속 미용사나 다름없던 동네 필 헤어는 (우리 동네에는 필(Feel) 헤어와 휠(Feel) 헤어가 각각 있어 헷갈리지 않아야 했다.) 할 때마다 달라지는 커트 모양 때문에 엄마의 심기를 들었다 놨다 했지만, 상당히 저렴한 가격을 자랑했다. 도박이긴 했으나, 내가 원하는 머리는 7~10호 정도의 얇은 롯드로 머리를 말고 각종 염모제가 묻어 얼룩덜룩한 수건으로 도포된 펌제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와 뒷덜미를 감싸 묶고 앉아 있으면 완성되는 머리였기 때문에 많은 고민 없이 필 헤어로 향했다. 사진첩에는 원장님께 보여드릴 레퍼런스로 애니모션의 이효리, 허니의 제시카 알바, 스텝 업의 제나 드완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동네 미용실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어린애(?)가 펌을 하고 있으니 펌이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 동안, 소위 말하는 아줌마 펌을 하러 온 손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 이것저것을 묻거나, 정치와 젊은이들에 대해 본인이 우려하시는 바를 쏟아 놓기도 했다. 유쾌하지만은 않았으나 속으로 '나는 이효리다.' '나는 제시카 알바다.' '나는 일류 댄서다.' '여기서 발끈하면 내일 연예 뉴스 1면에 기사가 난다.' 같은 생각을 읊조렸다. 너무 바쁜 스케줄로 피곤하지만 팬 사인회를 하는 연예인의 심정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네~ 네~' 하며 넘겼다.
그리고 나는 이효리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거대했다.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도 화려한 머리카락 때문에, 어딘지 꾸민 것 같아 보였다. 저 멀리서 보아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해그리드 같다고도 했다. 물론 나는 이효리니까 개의치 않았다.
쿠션감과 복원력이 좋은 머리카락은 자고 일어나도 여전한 풍성함을 자랑하곤 했다. 혹여 가라앉았다한들 남들 펌한 것만큼은 고불거렸다. 신입생 OT와 MT 등 밤샘과 숙박을 동반한 행사 참여 시 큰 장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가 잦아들면 대학에 입학할 신입생 전용 머리로 지금도 추천하고 싶다.
그 머리는 스무 살 내가 춤추는 곳이면 늘 따라다녔다. 원래 곱슬기가 심한 머리는 펌이 잘 풀리지도 않아서 그해 가을이 되도록 사자 같은 머리 (지금은 히피펌이라고 보이려나?)을 하고 다녔다. 덥수룩해 보여서 덥지 않느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펌의 컬이 잘아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지났다. 어쩌다 큰 바람이 불면 그 큰 바람을 버혀내어 바람을 가득 품는 머리였다. 나는 그렇게 모은 바람을 머리에 달고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볍고 또 가벼웠다. 거대한 솜사탕 같이 가벼웠다. 그리고 정말 어디로든 다녔다. 그 해 계절학기 두 과목은 모두 C를 받았다.
TPO가, 그리고 옷이 사람을 빚기도 하듯이, 20살의 나는 저 해그리드 머리가 빚었다. 20살의 나는 수능과 입시라는 정해진 목표 지점의 테이프를 끊고 도착한 결승선에서 대학에 들어갔고, 아무도 무엇을 해야 할지, 그다음은 어떻게 고민하는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막상 맞닥뜨린 자유에 기쁘다가도 두려웠다. <아무튼, 술>에서 김혼비 작가는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가능하다면 내가 정해놓은 주사의 경계 안에서만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다. 어쩌면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어서 경계를 정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뚜렷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 문장은 그때의 나를 생각하게 한다. 경계가 없는 자유 속 가진 것은 해그리드 머리와 나는 이효리라는 마음속 주문뿐이었던 시절. 거대하고 가벼운 머리카락은 나를 춤추듯 살게 했다. 허니처럼, 이효리처럼.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향해서 바람을 달고 움직여보곤 했다. 자유를 다루는 법을 연습하곤 했다.
꽝꽝 온몸을 흔들던 비트가 나오던 강남역의 한 클럽으로, 첫 섹스가 있던 어두운 조명이 야했던 모텔로,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편입을 검색했던 네이버 검색창으로, 동기들보다 뒤처지는 영어 실력에 좌절했던 대형 강의실로, 패잔병처럼 망친 시험을 뒤로하고 향했던 창경궁과 대명거리의 샤브샤브 집으로, 자유를 다루는 것에 익숙지 않은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마구 움직였다. 모든 움직임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바람을 담은 머리를 한 스무 살의 나에게 넘어지는 건 별 일 아니었다. 볼드한 머리를 가진 나는 이효리니까.
13년이 흘렀다. 서른셋, 이 쯤되면 더 이상 넘어질 일은 없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도처엔 넘어질 이유가 다분하다. 백수가 되어 나는 다시 경계 없는 자유를 얻었다. 넘어지는 것을 별 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기엔 뼈와 관절이 예전 같지 않다. 돈 들어올 구석이라곤 요원한 브런치 글쓰기를 하며, 방구석에서 먹고/먹이고 살고/살리는 것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에 매몰당하지 않기 위해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를 끄적인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다시 한번 바람을 담는 마법의 머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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