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회피를 자유라 믿었던 나와 마주하다.
나의 20대는,
지금 돌아보면 꽤 치열했다.
나는 나의 열정을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그리고 내가 가길 원하던 곳에
거침없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살았다.
아무도
달리는 나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추라 해도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꿈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며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으며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아도 되는 삶."
그 꿈을 당당히 외칠만큼
나는 너무나 오만했고,
자만했으며
내 삶에 자신 있었다.
그게
내가 생각한 "자유"였다.
스스로 선택하고,
간섭받지 않으며,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
그것이야말로
성공이고
내가 원하는 삶이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정말 앞만 보고 달렸다.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없이
양 옆을 가린 채
앞만 바라보며 달리는 경주마처럼
"질주"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시절을 살았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나는 늘 바빴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해도 하루가 벅찼고,
불편한 사람은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만큼
듣기 싫은 말은 들을 이유조차 없을만큼
일이 많았다.
숨이 가쁘게 몰아쳤지만,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고
나름대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참 당차다, 거침없다, 믿을만하다"
미국유학을 결정할 때도
장학금을 받았고,
가고 싶은 학교를 스스로 골랐다.
내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 시절의 나는
자존감인지 자존심인지 모를 어떤 힘에 취해 있었고,
세상이 항상 나와 함께 한다 생각할 만큼
두려움도
불안도
겁도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성공이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는 자유.'
명성도 중요하지 않았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행복을 느끼진 못했지만
내가 누리는 것에 대하여
만족하며 큰 불만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만의 방식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자유는 어쩌면 '회피'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착각이 아니었을까.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고,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선택, 나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밀어냈다.
돌아보면,
나는 반밖에 성장하지 못한,
불완전한 어린아이였던 건 아니었을까.
그 착각은
내 안의 오만이 되어 거만이 되었고
그 성벽을 깨뜨리는 데에는
아이 하나면 충분했다.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철옹성처럼 단단하다 믿었던 그 벽은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해외로 나가는 게 드물었던 시절에도
영국에서 연수를 마친 뒤
혼자 배낭을 메고,
유럽을 여행했다.
언제나 그렇듯 자유로웠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게 성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의 걱정도, 두려움도 이해 못 했던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다 컸다고 믿었지만,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크다 만 어린아이였다.
"그 어린아이 같이
불완전하고 부족했던 나의 자아는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나이를 먹으며 저절로 얻어지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진짜 어른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첫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나 자신도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장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디고,
아픈 일이었다.
세상이 알려주지 않았던 질문들 앞에서
아이보다 더 먼저 흔들리는 나를
매일 마주해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내 안의 날카로운 모서리와
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