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만나면, 이번엔 내가 드릴게요...
어릴 적 내 아빠는 권위적인 존재도 아니었고,
묵묵히 벽처럼 서 있는 아빠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말 친구 같은 아빠였다.
나는 아빠의 이름을 부르며 장난치기도 하고,
이상하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아빠는 늘 웃으며 받아주었다.
내가 어릴 적 만난 사랑은,
바로 그렇게 장난과 웃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엄마에게서 사랑을,
아빠에게서 책임을 배운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거꾸로였다.
엄마에게서 삶의 무게와 책임을 배웠고
아빠에게서… 무한한 사랑을 배웠다.
겨울방학이 오면 나는 늘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공무원이었던 아빠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나를 스케이트장에 데려갔다.
스케이트 신발을 신겨주고,
빙판 위를 돌고 있으면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해주던 아빠.
“춥다”라고 하면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주고,
뜨거운 어묵 국물을 호호 불어
내 손에 쥐여주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의 나는 참 당당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한 사람,
바로 아빠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몰랐다.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자리가
얼마나 어렵고 고된 자리였는지를.
아빠는 9남매 중 둘째였고,
가족을 책임지는 공무원으로
해야 할 일도,
돈 들어갈 곳도 끝이 없었다.
지금은 조금 보이지만,
그땐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보니
그 모든 삶이
결코 쉽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아빠는 내게 단 한 번도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20대 초반, 연수를 마치고 영국에서 돌아와
첫날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너 가고 나서 처음 따뜻한 밥을 먹는다.”
나는 물었다.
“왜요?”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떠난 후에도
엄마는 늘 새 밥을 지었고,
아빠는 내가 앉던 자리에
그 새로 지은 밥을 가장 먼저 놓았다고.
그리고는 아침에 놓았던
차갑게 식은 밥을 물에 말아 드셨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땐 잘 몰랐다.
그게 어떤 사랑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내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게 된 지금은
그 장면이 마음을 울린다.
그건 매일의 기다림이었고,
무심한 척,
그리움을 삼키며 버틴 사랑이었다.
아빠는 표현이 서툴렀다.
전화로는 말하지 못했지만
먼 타국에서 밥은 챙겨 먹는지,
속은 곯지 않았는지
매일 걱정하고 또 걱정했던 사람이다.
그땐 그 마음을 몰랐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철부지였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내 가족을 꾸리면서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때 아빠가 내게 했던 말들.
“힘들면 참지 마라. 그냥 와.
다른 건 몰라도
세끼 밥은 꼭 먹여줄게. 그거 하나는 걱정 마라."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너무 따뜻해서,
너무 진심이 느껴져서
오히려 감당하기 힘들었던 말.
그 사랑이, 그 따뜻함이
내게는 너무 컸던 것이다.
나는
아흔을 넘긴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꼭 다시 만나자.
그때는 아빠가 딸로 태어나고
내가 부모가 되어
딱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더…
당신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그건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은
나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나는 사랑을 아빠에게서 배웠다.
그 사랑은
뜨거운 어묵 국물 한 그릇,
차가운 밥을 물에 말아먹으면서도
끝내 내 자리를 비워두던
그 조용하고 깊은 마음이었다.
아빠는 말한다
"딸이 그리워 눈에서 진물이 난다"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아이처럼 운다.
그렇게 부모는
멀리 있는 자식이 보고 싶어 눈에서 진물이 흐르고,
자식은
그 사랑이 그리워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