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옳았다, 숫자 3의 지혜"
아빠의 품은 늘 따뜻했고, 그 사랑은 내 안에 평생의 뿌리처럼 남았다.
하지만 아빠가 남긴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
숫자 3을 좋아하시던 그 철학,
그 균형의 가르침 역시 나를 따라다니며 결국 내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에 스며들었다.
아빠는 1부터 10 사이에서 늘 숫자 3을 좋아하셨다.
1은 너무 힘들다.
"늘 앞서가느라 뒤를 돌아볼 틈도 없고,
또 누가 뒤따라올까 걱정하느라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지치고 고단하다."
"2는 1을 따라가느라 벅차다."
그래서 아빠는 균형 잡힌 3이 좋다고 하셨다,
둘이 싸워도 3이 중간에서 조율하면 되고, 가운데서 버티는 게 더 낫다며
늘 말씀하셨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견딜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욕심 많았던 나를
뒤에서 살며시 잡아당기고 싶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운동회 달리기 대회에서 나는 항상 1등으로 들어왔다.
상으로 받은 노트며 연필을 들고 개선장군처럼 들고 와 아빠에게 자랑하면,
아빠는 나를 꼭 안아주지 않고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1등을 해가지고 와? 3등 하라니까."
그 순간마다 속이 부글부글 끊었다.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봐 주지 않는 그 말이 너무 서운했다.
그 모습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빠의 유일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면,
내 아이들한테는 절대 3등 하라고 안 할 거야.
꼭 1등 하라고 할 거야.' 하며 아빠를 흘겨보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다짐이, 결국 나를 어디로 데려올지.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단 한 번도 "1등 해라, 만점 받아라."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게 내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남편은 지금도 그런 나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놀리곤 했다.
아주 가끔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어보곤 했다.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백점 맞으라고 안 해?
아니면 왜 친구들 시험은 어땠냐고 물어보지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는 아빠보다, 더 아이들 등수를 묻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득,
아빠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했다.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분명 치열하게 살았고, 늘 1등을 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삶’을 가르치려 했던 건 아닐까.
아빠가 좋아하던 숫자 3,
그 균형의 철학이 결국 내 안에 남아
내 아이들의 삶에도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고백한다.
아빠, 그때는 왜 1등 했던 나를 안아주지 않았냐고
속으로 수없이 원망했는데....
이제는 안다.
그 말이 사실은,
내가 평생 붙들어야 할 지혜였다는 걸.
좋은 기억은 결국 추억이 되어,
나를 다시 일으킨다.
아빠가 좋아하던 숫자 3처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한 삶이
결국 가장 빛난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건 아마도 숫자 3을 좋아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 결국 당신이 옳으셨어요....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제
내 아이들 삶 속에서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