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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나를 마주하다.

선'너머의 사랑.- 가끔씩 나의 말끝에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by 감차즈맘 서이윤


나는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내 일을 내려놓았다.


사춘기의 문턱 앞에 선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물었다.

“놓을 수 있겠어? 그동안 해온 게 있는데, 아깝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어릴 때보다 지금이 더 곁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많은 순간들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보이지 않는 울타리처럼 곁을 지켰다.


그렇게 이어진 시간 속에서,

첫째가 갭이어를 선택했을 때에도, 나는 엄마가 그랬듯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다.

갭이어 동안 나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설명할 수 없는 빈자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첫째의 대학 1학년이 끝날 무렵, 그 빈자리는 점점 선명한 서운함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쌓여온 서운함은 점점 무게가 되어 내 마음을 늘렸다.


드디어, 둘째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그 무게는 마침내 또렷한 바람이 되었다.

‘위로받고 싶다’


“엄마, 수고했어요.”

“엄마, 고마워요.”

그런 말 한마디를, 아들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딸에게서 듣고 싶었다.


위로받지 못한 서운함은 곧 기분 나쁨으로 번졌고, 깊이 눌러 두었던 내 안의 뾰족함이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결국 첫째가 아스펜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참아온 감정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도 울고, 나도 처음으로 아이 앞에서 울었다.

억울해서, 서글퍼서, 너무 외로워서 울었다.


그날 이후 내 안의 뾰족함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참았던 감정들이 표정이 되고 말이 되었다.


나는 왜 뾰족할까.

둥글고 부드럽게 살지 못할까.

내가 가진 예민함은 말끝의 서늘함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에 박히곤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민한 사람은 어릴 때 사랑을 덜 받아서 그렇다.”

정말일까. 나는 사랑받으며 자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사랑이 닿지 못한 구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늘 나를 “내 강아지”라 부르며 예뻐했다.

그런데 그 다정한 말투가,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는

때로는 서늘한 찬바람으로 바뀌어 나오곤 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은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뾰족하다.

아이들이 무례한 행동을 하면, 지금도 말한다.

“엄마랑 친구처럼 지내는 거지, 친구는 아니야. 선 넘지 마.”


가끔씩 뭉툭한 날을 감춘 채 둥근 척하는 남편에게도

가끔씩 나도 모르게 말끝이 서늘해진다.

“선 넘지 마. 나이 들어 혼자 있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조심해."


그러고는 미안한 마음에 밥상을 차린다.

하지만 그건 미안해서 차리는 밥이지, ‘다음부터 안 뾰족하겠다’는 약속은 아니다.


나는 뾰족한 사람이다.

바꾸려 애썼지만, 이 결은 오래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 뾰족함 덕분에 나는 남의 상처를 더 빨리 느끼고,

말을 조심하며, 사람 앞에서 오래 고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안다.

내 날카로움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조심하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둥글어지고 싶다.

그렇기에 오늘도, 뾰족한 나를 달래며 살아간다.

언젠가는 조금 더 둥그러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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