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너는 내 스승이었나 보다.

아이길에서 나를 배우며 (번외 편)

by 감차즈맘 서이윤

전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때 떠올린 '전생'이라는 말이,

오늘은 딸에게로 향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딸이 나에게

스승처럼 느껴진 날.


때로는

내가 딸에게 스승이고 싶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딸하고의 관계에서

그런 기분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다.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딸은 분명

나에게 스승이었거나

아니면 한참 앞서 걸어가던 선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오늘도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딸은 함께 살고 있는

룸메이트 이야기를 꺼냈다.


같이 사용하는 학교 기숙사에

그 룸메이트의 남자친구가

와서 자고 간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이미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딸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오 마이 갓!” 하고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겨우 대학 2학년인데,

그건 아니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딸은

잠시도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요즘은 다 그래.”


“아니야, 그건 아니지.”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받았고,

그렇게 실랑이가 이어졌다.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엄마는…

너랑 이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이야기를 끊은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침내 전화를 끊을 시간이 다가오자

딸이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엄마, 우리 생각이 다른 거지.

내가 엄마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그냥 말하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사귀는 것도 아니고,

난 엄마 생각을 존중해.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 아니야.


엄마 의견을 알고 있고,

내가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엄마의 생각도 중요하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다.


왜 나는

'우리 생각이 다른 거지.

엄마가 너를 존중해.'라는 말을

먼저 꺼내지 못했을까....


왜 나는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했을까.


창피해서,

부끄러워서,

잠시 숨고 싶어졌다.


잠시 침묵하다가

나도 조용히 말했다.


"엄마도 너를 존중해.

그냥… 우리 생각이 다른 거야.


먼저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엄마가 좀 부끄럽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깨달았다.

방금 전의 대화에서

딸이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는 걸.


스무 살 무렵,

아니 서른에도, 마흔에도,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과연 부모님에게

저런 말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랑 나의 의견이 다른 거지,

엄마를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나는 그런 말을

부모에게

평생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이가 든다고

철이 드는 게 아니라,

나이가 어려도

충분히 철이 들 수 있다는 걸.


딸은 늘 나에게 좋은 스승이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딸은

키우는 동안에도

내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져왔고,


원하지 않아도

그 질문 앞에 서서

생각하고, 돌아보고,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다 성장하지 못했나 보다.


여전히 그 질문들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배우는 중이다.


어쩌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장 오래 공부해야 할 과목은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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