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반하다.

말이 멈춘 자리

by 감차즈맘 서이윤

아들이 돌아오고 난 후,

좋다가도 무엇인가 하나가 어긋난 것처럼

우리의 하루는 자꾸 삐그덕거렸다.


바퀴가 틀어진 것처럼,

나사 하나가 잘못 끼워진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우리는 계속 부딪혔다.


다음 학기부터 학교 라디오를 맡게 되었다며

LA 도서관에서 녹음실을 예약해 연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아들의 하루가 더 바빠지고, 더 길어지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 하루도 함께 길어지기 시작한 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하루 종일 붙어 지냈다.


아침도 같이,

점심도 같이,

저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아침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려오면

공부한다며 방으로 들어가던 아들이었다.


방과 후에는 활동하느라 바빴고,

방학이면 스펙을 만들느라 바빴다.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함께 지내온

나는 내가 아들을 잘 안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 일 학년이 된 아들은

학교 신문사에서 에디터가 되었고,

라디오 진행도 맡게 되었다며

유난히 뿌듯해했다.


그것은 지난 한 학기를

나름대로 바쁘게 살아왔다는

자기만의 증표처럼 보였다.


대견했다.

정말로....


그런데,

그만큼 아들의 세계가

커지고 있는 건지,

나에게 매번 엄마 이건 어떻게 생각해?


정치이야기에서 전쟁이야기로

세상이야기로 하루가 흘러갔다.

내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들은 내 말위에 자기 말을 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 지내보니,

얼굴에 지친 기색이 다 드러났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을 도서관에 데려다주며 말했다.


“저녁엔 아빠가 픽업할 거야.”


“엄마 안 와?”


“어, 오늘은 집에서 좀 쉴게.”


“아, 그럼 나 급한 거 아니야.”

안 가도 돼.”


“아니, 왜 안 가?”


“간다고 했으면 가야지.”


말이 쌓이고,

지난 일까지 다 튀어나오고,

시간이 흘러

서로 지쳐갈 즈음,

딸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야!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너 지금 태도가 뭐야?”


그리고 잠시 숨을 내쉬고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손 들어.”

이건 다섯 살짜리도 안 하는 행동이야.

어린아이처럼 굴면,

대우도

나이에 맞게 받는 거야."


순간,

아들도 나도

말이 없어졌다.


딸은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 뭘 그렇게 일일이 받아줘.”

“저건 다섯 살 행동이야.

엄마가 맞춰주니까 계속 그러는 거야.”


너무 놀라,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딸과 눈이 마주칠까 걱정하면서도

결국은 참지 못하고

몰래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이게 웬걸....


그곳에,

아들은 정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딸이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고, 잘못한 거 같으면

엄마한테 가서 공손히 사과해.”


“이건 사춘기 때도 안 하는 행동이야.”


“대학교 다니면서,

너 그동안 무슨 생각하고 살았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 좀 줄여.

너, 말이 너무 많아.”


누나의 한마디에

아들은 찍소리도 못 하고 얌전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들이 아니라

내가 말이 없어졌다.


나는 늘,

딸이 나와 아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날 딸의 눈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눈빛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눈빛에

나도, 아들도

동시에 기가 죽었다.


키도, 덩치도

누나보다 더 큰 녀석이

한마디도 못한 채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딸에게서 한수를 배웠다.


싸움은

덩치가 이나라

눈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엄마 미안해.

다음부터 안 그럴게.

잘못했어."


너무 쉽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쌉싸름해졌다.


내가 한마디 하면

삼십 마디, 사십 마디를 쏟아내던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얼굴을 쓰고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알았다.

이제 내가 물러설 자리를

벌써부터 보고 있다는 걸.


곧이어 딸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너, 행동 똑바로 해.

집에서도, 밖에 나가서도."

그 말에 아들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 어 다음부턴 더 조심할게.

잘못했어"


그리고 다음날부터,

가는 날까지 아들은 정말 조심했다.


나에게도,

누나에게도


너무 낯선 그 모습에

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끼어들 수는 없었다.


이건

둘 사이의 서열이 정리되는 시간이었고,

둘의 관계는

이제 아이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기죽은 아들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알았다.

이제 내 손을 떠났다는 걸.


그날,

나는

딸아이의 카리스마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멋진 모습이었다니....


아들의 쳐진 뒷모습과는 반대로

딸은

또렷하게 서 있었다.


나는

아들과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오래 믿고 있었다.


그런데 딸의 그 눈빛 앞에서,

내 마음은

너무도 가볍게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내 인생이 아니라

내 믿음이

얄퍅해 보였다.


어쩌면 그날,

얄팍해 보인 건

내 인생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던

내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이렇게

얄팍하고도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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