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 Apr 07. 2022

차가운 마음으로 따뜻한 계절을 맞는다


잠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의사를 찾아갔다. 잠이 참아지지가 않아요.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눈만 잠시 감으면 잠들어 있어요. 언제부터냐고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겨울부터였던 것 같아요. 제 하루만 반으로 접힌 기분이에요. 남들보다 딱 절반만 살고 있어요. 그런데 아깝지 않아요. 시간이 더 빨리 가줬으면 좋겠어요. 입버릇처럼 원하던 언젠가, 그 언젠가로 가고 싶어요. 갈망이 제게 병이 된 걸까요.


의사는 녹음기처럼 준비된 물음말들을 쏟아낸다. 사람도 계절을 타요. 계절 탄다는 말도 사실이고요. 혹시 최근에 이런 적이 있었을까요? 누군가 여행을 간다고 하면 나도 따라갈래, 한다던가. 누군가 밥을 먹자고 하면 내가 살게, 한다던가. 옷을 막 사고 싶다던가. 전자기기를 바꾸고 싶다던가. 그런 거요.


그러고 보니 그랬죠. 두 달 전 딱 제가 그랬어요. 친구가 강원도로 여행을 간다길래 따라갔다 왔죠, 좋았어요. 후배가 밥을 먹자길래 사준다고 했죠, 뿌듯했어요. 옷장에 걸린 옷들도 꼴 보기 싫어서 다 내버렸어요. 중고로 내다 팔거나 같은 동네 누군가에게 나눠줬죠. 속 시원했어요. 전자기기도 샀죠, 삶이 더 편해졌어요.


그럼 그때예요. 그때 에너지를 다 쓰신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당연히 쓸 힘이 없죠. 잠을 많이 자는 것도 당연하고요.


듣고 보니 맞는 말씀 같아요.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걸까요?


봄이 오면 대부분 좋아져요. 사람이 저 끝까지 무너졌을 때는 이런 데 오지도 못해요. 알아서 나을 때쯤에 여기 오신 거고요.


준비된 말들을 쏟아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똑바로 들었으면 저렇게 빠른 속도로 물어볼 수도, 저렇게 어긋남 없이 대답할 수도 없다. 당신이 신경 쓰는 것은 눈앞에 있는 나도 아니고, 내가 왜 잠에 빠져 사는지도 아니고, 대기 중인 환자가 3명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다가오는 점심시간이었겠지. 그럼에도 당신의 숨차는 진단 중 한 마디가 마음에 들었다.


"봄이 오면 대부분 좋아져요"




병원을 나서자 정말 봄이 와 있었다. 겨우내 앙상하던 나무에 봉긋하게 꽃망울이 맺혔다. 아파트 단지를 지키는 벚꽃 나무에도, 두부 가게로 이어지는 개나리 더미에도 색이 묻어 있다. 분명 오늘은 겨울이었고, 이 거리에 핏기 한 줌 없었는데. 두 시간 전에 지나온, 똑같은 길인데...


바로 그 길 위에서 나도 이제 달라져 보기로 했다. 훌훌, 털어버리지는 못해도 모른 척 다시 깨어나 보기로 했다. 봄이 왔으니까. 이제 봄이 됐으니까.


이 마음이 사라질까, 눈앞에 보이는 트럭으로 곧장 달려갔다. 꽤 자주 집 앞 골목에 찾아와 꽃을 파는 트럭. 한 번 훑어보고는 가장 밝고 싱그러운 놈을 골랐다. 샛노란 수선화. 녀석을 데려와 방 창가에 놓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좋아한단다. 바람을 쐬어줘야지.  물도 좋아한단다. 물도 적셔 줘야지. 그런데 보다 보니 이 아이, 꽃 속에서 꽃이 핀다. 이미 꽃인데 또 꽃을 피워내려 애쓰고 있다.




차가운 마음으로 따뜻한 계절을 맞는다. 아직 따뜻해지기는 이른 것 같은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따뜻해진다. 아무리 차가운 마음으로 버텨보려 해도 이 차디찬 구석까지 와 온기를 전해준다. 그동안 추웠지? 어제가 마지막 추위였어. 이제 그만 봄으로 와.












매거진의 이전글 MZ라고 미워하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