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일찍이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 자취를 시작하게 됐다. 그 날은 아빠 손을 잡고 서울의 한 부동산으로 들들어가고 있었다.
"여대생이 편하게 살 방 좀 보여주세요."
부동산 사장님이 처음 보여준 것은 보증금 500에 월세 35짜리 방이었다. 콩만한 방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책상, 세탁기, 침대 ... 그러나 문제는 나 하나 앉아있을 바닥이 없었다. 4평, 그곳은 냉장고 문만 열어도 방이 그득그득 찼다.
아빠 표정은 급격하게 시들었다.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하신 거다. 혀를 끌끌 차며 내 손을 잡으셨다.
"이런 데서 어떻게 혼자 살겠노. 맞제?"
"월세 좀 더 주면 되는 거 아닙니꺼. 더 좋은 방으로 보여주이소."
그렇게 월세 5만원을 더 올려 다음 방으로 갔다. 신사임당 한 장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교회 건물에 딸려 있는 꼭대기층 방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작은 냉장고와 곰팡이가 서린 싱크대, 누런 벽지가 특징적이었다. 그래도 친구 한 명 정도는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아빠, 나 이 방으로 할게"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탐탁치 않아 했다. 옆 방 때문이었다. 엘레베이터도 없는 꼭대기층인데, 옆 방에는 남자분이 살았다. 빨래를 한다면 같은 옥상에 널어야 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랑 같이 빨래를 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결국 또 고개를 젓게 했다.
"보증금도 더 올리면 된다. 어차피 보증금은 나가는 돈은 아니니까..."
한참을 걸어서 다음 방에 도착했다. 1000만원이라는 목돈이 들어가는 방이었다. 유일하게 환한 백색등이 우리를 반겼다. 책상, 세탁기, 침대 사이 사이에도 공간이 있었다. 창문은 작았지만 대신 튼튼한 창살이 있었다. 아빠는 그 창살을 잡고 한참을 흔들어 보았다. "누가 들어오면 안 될 거 아니가."
아빠는, 자기 대신 든든한 창살이 지켜주는 그 방을 계약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돈이 없지, 방이 없겠나" 했던 호언장담도 맞았다. 깨끗하고 뽀송한 자취방을 꿈꿨지만, 현실은 5만원 한 장 차이로 내가 숨 쉴 공간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어찌됐든 이젠 그 작은 방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2018년 3월이 되었다. 매 달 10일이면 관리비 빼고 42만원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골똘이 궁리하는 차였다. 세련된 카페에 가서 친구랑 마끼야또를 마시고 싶었지만, 내 방 의자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것에 만족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때 운좋게 한 뮤지컬 티켓을 받게 되었다.
촌년이라 뮤지컬은 처음이었다. 그 처음은 나를 오프닝부터 눈물짓게 했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서울살이 몇 핸가요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하나요
서울살이 육 년, 일곱 번째 이사
낡은 책상, 삐걱이는 의자
보지 않는 소설책, 지나간 잡지
고물 라디오, 기억이 가물가물한 편지
그런 것들은 버리고 와요
서울살이 여러 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론가요?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그때 고작 서울살이 2개월 차였다. 그 사이에 뭣이 그렇게 서러웠는지 서울살이 선배들에게 위로받고 싶었나보다. 돈이 없어서 햇반에 참치, 쌈장만 내내 비벼먹었던 때였다. 통장 잔고에는 딱 2만원이 찍히는데 용돈날까지 남은 일주일, 나를 어떻게 지킬지를 몰랐다.
이 연극을 '한예종' 학생들이 만들었다고 들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버스로 딱 두 정거장 걸리는 대학이다. 꿈과 희망을 가득 안고 상경하는 우리 청년들은 용감하다. 그러나 서울살이는 그런 우리를 재빠르게 무모했다며 좌절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점차 잊게 만든다.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서울살이 여러 해, 당신의 꿈은 아직 그대로인가.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