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홀 May 24. 2020

감각의 책장: 빛이 어둠을, 어둠이 빛을 정의한다

무의식에 마련된 책장에서 감각의 기록물을 꺼내 읽다.

블랙아웃, 빛과 어둠을 마주하게 하다

빛과 어둠을 흑백논리에 가두고 둘 사이의 관계를 가르는 것은 극히 오래된 문화에 길들여진 사고다. 긴밀하고 협조적이며 대조적으로 서로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키는 빛과 어둠의 속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밤이 되면 무서워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니까). 물론 각자의 사고 체계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은 본인의 명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에 도출된 안타까움 정도. 심지어 과학적 정의로 둘을 풀면 오히려 관계가 뚜렷해진다. 빛은 시각 신호를 창조하는 전자기파, 어둠은 그런 빛의 부재 상태나 최소화 상황을 의미하니까. 쉽게 말해 빛이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준다거나, 어둠이 빛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던가 하는 것이다.


블랙아웃은 기억의 부재를 의미할 때 쓰이기도 하지만 에너지 차단으로 일어나는 빛의 부재이기도 하다. 블랙아웃이 일어난 딱 일순간에는 예상 못한 암흑 세계가 찾아오고 사고 회전이 멈추기도 한다. 짧은 세월을 지나보내며 자주 겪어본 현상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강렬히 뇌리에 꽂힌 감각이다(-감각의 부재이면서). 첫 정전 현상으로 얻은 기분을 설명하기에는 겁많은 사람으로서 놀이기구를 처음 탈 때 느꼈던 짜릿함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공포와 스릴의 경계를 건너는 기분.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행위의 능동과 수동. 당한 자의 기억이 더 오래남듯 그 시절 기억이 대게 희미한데도 정전의 기억은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빛은 어둠을, 어둠은 빛을 드높인다.

장소는 살던 거주지와 동일 단지 내에 있던 다른 동 아파트였다. 여타의 외부 환경이나 원인은 떠오르지 않지만 친구의 집으로 놀라갔던 것만은 기억난다. 아이답게 친구와 놀고나서부터가 선명한데, 친구 어머님이 거하게 차려주신 대게 다리들이 한 움큼 그릇에 담겨있었다. 어려웠던 시기에 양껏 먹어보지 못했던 해산물을 마주해서 그 시간이 더 늠름하게 지금도 자리한 것 같다. 어찌되었든 둥그런 나무 식탁을 둘러 앉아 가위로 대게 다리를 잘라주시는 어머님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였다. 군침을 꼴깍 삼키며 친구와 기다리던 내게 갑작스레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다름아닌 정전이었다. 


무서울 법도 한 나잇대에 찾아온 그 상황은 그렇게 나쁘게 몰아갈 수가 없었다. 밤과 암흑의 겸손함을 본능적으로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어둠의 상징격인 밤의 경이로움이란 보통 내려다보이는 건물 불빛의 아른거림이나 하늘에 수놓인 별의 퍼포먼스로 인함이다. 그런데 직접 어둠과 직면해보니 그 자체로 경이로움에 밀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경험이었을까. 어떻게 보면 공간감의 상실로 우주에 진입한 것도 같고, 완전한 차폐로 혼자만의 시간을 선물받은 것도 같으며, 강제 입력되던 시각 정보를 처리할 수고를 덜어주는 친절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이 순전한 어둠이 내려앉자 그동안의 오해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밤, 암흑, 어둠은 원체 사람들에게 등한시되거나 거부되어서 스스로 자리를 피해줬음을 몰랐다. 


이내 깜깜함에 익숙해지려던 찰나 따스한 생명불이 온기를 내뿜으며 나타났다. 어머님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불씨가 조심스레 타고 있는 양초였다. 까마득한 세상에 유일하게 발광하는 자태는 어둠의 겸손함을 빌어 찾아온 또다른 경이로움이었다. 숨소리조차 작게 들리던 공간을 은은하면서도 풍성하게 채워가는 것은 단지 하나의 촛불이었다. 아무 존재도 되지 못한 채 밍그적대며 망설이던 이를 존재로 높여주는 축복. 그것은 불빛에게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어둠만 빛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나도 매일반이었나보다.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스스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뿐은 아니었다. 매상 어둠 속에 갇혀있다면 어둠에 이정도로 매료되려나, 반대로 빛에 비춰지고만 있다면 빛에 이정도로 빠져들런지. 어쩌면 많은 이들이 관계의 정립을 '자와 비자의 대립'으로 할 것으로 실감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니 여전히 그러니까. 그러나 적어도 정전을 통해 빛과 어둠의 진정한 찬란함을 본 순간만큼은 빛이든 어둠이든, 또는 본인이든 타인이든 존재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어찌보면 관계 덕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빛과 어둠처럼 겉으로 대립하는 구도라 생각되어도 면밀히 보면 사실은 '자와 비자의 축복'이 관계의 지향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원론적 사상과 가치관은 잘못한 게 없지만 그게 과도한 대립이라면, 하나를 낮출 수 밖에 없다면 잠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기 힘들 것만 같다. 나도 그 뒤로 숫자뿐인 성적이나 짓밟아가는 성공을 해대느라 모든 것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지 못했으니까. 이제야 알게됐다. 

아마도 너가(-또는 그것이) 있어 나는(-또는 그것은) 의미로운 것 같다.
이전 07화 감각의 책장: 복통이 오면 반성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