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사랑하기 프로젝트: 나에겐 빡빡하게, 너에겐 넉넉하게
인간은 회피 덩어리다. 특히 책임 소재에 있어서는 회피에 대한 반사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피해 받을만 하면 소스라치게 던져버리고, 미움받을만 하면 까무라치게 외면해 버린다. 나마저도 그러기에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자기가 개입된 게 자명함에도 뻔뻔하게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싶다. 그래서 나도 어지간히 해보려 한다.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권리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마땅한 책임을 지지 않는 자는 권리만 누리겠다는 이기적인 양태를 보이는 것과 같다. 어쩌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을까. 정이 많았다고 회상되는 수십년 전 마을공동체 사회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책임회피자들의 사회는 씨족사회까지 거슬러가도 유지되리라 본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그래도, 누군가는 그래도 적어도 나는 책임에 맞서야 하는 것. 미움받을 용기가 한 때 히트쳤다면 책임질 용기에게도 한 몫의 역할을 줄 필요가 있다. 책임으로 얻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무엇이랴. 그리고 겨우, 단지, 까짓것 그치들이 만물에서 인간을 특별하게 규정짓는 이성과 양심이라는 특질을 넘어서게 해도 되겠는가. 진화론적 생물로 치더라도 장기적 생존을 위해 그것이 그리도 도움이 될 성싶기도(-단기적인 시선을 원한다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계륵같은 업무 자리에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던 내가 누군가는 맡아야 하니 수용했던 그 일은 경험과 경력이 다분한 이들도 쉬쉬했고, 심지어 걱정해주던 선배들도 한 마디씩 충고했던 일이었다. 그렇게나 괜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실한 청춘의 열의와 패기로, 더불어 어리숙한 책임감을 밑천으로 하는 핏기어린 능력으로 담당자가 되었다.
미성숙한 신념 속에서 어느정도 잘 처리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면적으로는 속이 쓰린 균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순간적인 땜질로 메꿔오던 임기응변적 사건 수습들은 결국 동이 났는지 어쩔 수 없는 실수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마치 감춰놓은 진심이 행동으로 자유스레 드러나는 것처럼.
결재권자들의 책임 회피는 책임질 게 많으니 당연히 늘어날 수 밖에 없기에 충분한 이해를 거듭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은 나는 책임질 게 없으리라고 간주되는 신입이었기 때문이다. 아슬하게 줄타오던 관계는 어떠한 작은 마주침으로 인해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 타이밍이 된 것이다. 노력과 성과의 반비례적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허탈한 상황을 맞이했어도 저지른 실수를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비성과적 성실은 '누가 이 짐을 짊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타인의 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해버렸다. 이 절망은 원망에 대한 원망으로 돌변하기 시작했고, 그간의 결심이 무력하게 나도 책임회피자가 되기로 당돌차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수습의 수순을 밟은 것은 나였는데, 알고보니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에 대한 이성의 합리적인 통제가 그제서야 발동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과 같은 단순한 논리 구조를 잃으면 나도 책임회피자가 되는 것은 삽시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적어도 나는 책임회피자들의 사회를 회피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이후에 씌어진 책임 프레임에 갇혀 오래 눈치를 보긴 했다).
아마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책임 아래 자유롭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는 누리고 책임은 버리는 일은 대책없이 놀고만 싶은 어린아이의 투정과 다를 바 없다. 이왕이면 자아와 타자의 부분 동일시로 양자를 교차시켜 다른 이의 책임을 떠안는 희생정신을 갖게 되면 이상향에 다다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책임을 똑바로 직시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런 사회적 인격들이 모이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책임회피자 혹은 책임전가자 에서 책임수용자들로 거듭나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