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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홀 May 16. 2020

감각의 책장: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노을

무의식에 마련된 책장에서 감각의 기록물을 꺼내 읽다.

꿈 혹은 직업의 가치 

감각의 책장을 이곳저곳 뒤지다 보니 그 틈에 들춰낸 감각기록물들만 수십 가지가 된다. 글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그 중에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의 재료로 사용된 것이 떠올랐다. 시간의 흐름은 대관절 막지못하는 것이 불변의 이치(-적어도 이 글이 작성되는 현재로서는)이며 그저 스스로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기억이다. 쉽게는 , 직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진화론적 생존 연명을 위한, 또는 소유론적 물질 만족을 위한, 아니면 자기애적 자아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직업을 볼 수 있으나 나에게 교사라는 직업은 학교부터 주어진 소명(-마틴 루터의 직업소명론에 따르면)이었다. 명히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는게 어린이 계에서는 순리와도 같지만 사회와 인간에 대한 회의감으로 가득찬 본인에게는 소명 외에는 직업의 가치로 거론되는 것이 메스꺼울 정도였다(-나의 주견에도 피차 메스꺼울 수 있겠지만). 그러면서 자연스레 삶의 방향성을 따라 옮겨놓은 발자취는 외적인 변인에 종속되지 않도록 소중하게 여겨졌고, 한 톨의 겨자씨가 마음 속에 고스란히 심어졌다.


목적의 낭만을 잃어버리다

주인이면서 정원사로서 학창시절을 잘 가꾸어 내었고 어렵사리 교대의 문턱을 넘어섰음에도, 문 안에서의 현실은 그다지도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 낭만의 부재는 외부 환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목적 결핍 혹은 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후에 되돌아보니 일시적이긴 했지만). 이는 다분히 3년이라는 세월을 유유히 잠식하는 데 유효한 배경이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보니 학교 오름길의 정취를 맡을 기회는 한참 있었다. 햇빛을 가르며 지각을 모면하던 아침이거니와 해질녘 어스름의 품에 포근히 안기던 저녁까지도.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를 갈고 띠를 매며 처절히 공부하던 때 가지고 있던 미래에 대한 환상이 그러한 정취를 담아내지 못했다. 지나간 3년은 목적의 결핍 혹은 망각이 이루어지던 시기로서 어찌보면 학생의 신분으로 시간을 헌납한 데에 대한 보상(-이지만 낭비적이기도 한)을 받아버린, 즉 목적을 이루려다 목적을 잃어버린 역설이었기 때문이리라.


단절 그리고 재연결

그렇게 무던히 던져가던 일상이 무료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마 임용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던 4학년의 어느때였던 것 같다. 우선적으로 마지막 관문이었던 시험을 준비하는데 어찌나 열의에 차지 못하던지. 습관이 주는 안락함에 매료되어 고매하던 이상향을 버려둔 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 매일 가는 도서관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 벼랑 끝으로 느껴져 불안에 사로잡혔다. 다른 학생들이 시험 준비에 한창 집중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과거를 저버리고 궤도를 벗어난 사람이 지난 행로의 동향(同向)으로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을까.


가차없이 엄습하는 우려에서 회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을 터덜터덜 걸어나와 한산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테니스 코트를 바라보며 벤치에 몸을 턱 놓았다.


가장 먼저는 나른한 낮의 온도와 한기서린 저녁의 온도가 교대하는 순간을 느꼈다. 그리고는 한숨이 짙게 배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거기서 마주한 것은 노을이었다. 그것은 단지 자연 하늘의 색채가 아니었고, 그저 감성 젖은 태양의 떨어짐도 아니었다.


을의 주황과 노랑이 일렁이는 모습은 최면으로 나를 이끄는 듯했다. 과거 지녔던 '아이들과 세상의 빛이 되어 또다른 빛을 키우겠다는 일념''그 일념을 비웃듯 길잃은 나그네마냥 정처없이 보냈던 3년'이 노을과 함께 일렁였다.


감정모를 최면에서 깨어나니 이제야 현실이 보였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이는 다리로서의 '현재'였다. 이제 비로소 맥이 끊긴 삶의 맥박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던져놓은  몸을 다시 일으킨 후부터 나는 언제든지 과거로 건너가 스스로의 약속을 떠올리며 미래를 그려갔다. 당연히 시험도 합격했고, 직까지 소명대로 걸음을 떼는 중이다. 그렇기에 드는 확신은

노을이 뜨는 이상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연결되어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왜인지 오늘의 노을이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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