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말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토마처럼 뛰어가,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넌, 뭘 해도 예뻐"
(명품백을 사주며)
역대 최고의 명스피치 혹은 명강의로 손꼽히는 연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울림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럿 울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떤 스피치가 청중(상대방)의 마음을 넘어 온몸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일까. 지금부터 상대방의 우심방에서 좌심실까지 관통하는 '말하기'에 대해 한 발짝 더 들어가 본다.
Photo by Clem Onojeghuo on Unsplash
"넌, 왜 '가슴'으로 말해?"
내가 집 떠 나와 이등병 때, 어느 선임이 내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타인의 마음에 와 닿게 말을 잘한다'는 칭찬으로 듣고 기뻐하려는 찰나,
선임의 말이 이어졌다.
"가슴에서 바로 말하지 말고, 머리를 거쳐서 말을 좀 해!"
당시엔 날이 너무 더워서, 그 말이 이해가 잘 안 됐다. 지금 돌이켜보니 역시 이해가 안 된다. 단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라고만 했는데, 다들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늑대마냥 날 물어뜯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다만, '본능에 너무 충실하게 말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만 있을 뿐.
1인칭 이등병 시점.
그럴 때가 있다.
딱 봤는데, 논리적이고 기계적으로 잘 쓰인 글이다. 그런데 전혀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글의 구성이나 전개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듯 막 쓰인 글인데, 이상하게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온몸에 파편으로 깊숙이 박힌다고 할까.
듣자마자 정신을 잃고 돈까지 잃게 만드는 사기꾼들의 유창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까지 완전히 빼앗을 순 없다. 잠시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전재산을 빼앗을 순 있어도. 아무튼 말이 논리적이고 유창하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 발음도 부정확하고 어눌하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그 메시지(내용)가 와 닿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2011년 미국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 추모식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51초간의 침묵'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정리하면, 말과 글의 유창함과 메시지 전달력은 상관없다.
취업컨설팅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엔 심청이도 울고 갈 효심의 효녀, 효자가 놀랍게도 참 많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부모님이 늘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라고 해서 정말 건강하게만 자란친구들이다. 소름 끼치게 '건강하기만' 하다.
반면, 불효자는 울 거라는 편견을 깨고 오히려 웃는 경우가 더 많다. 부모님의 기대를 과감히 문서 파쇄기에 넣고 없애버리기 일쑤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한 개고생을 통해서 자기소개서와 자기 PR을 풍성하게 만든다. 결국 제 발로 돌아다니며 차곡차곡 쌓인 마일리지가 인사담당자를 움직이는 포인트가 된다.
정리하면, 쓸거리나 말할거리는 발에서 나온다. 내 발에서 나온 글과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넘어 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Photo by Khadeeja Yasser on Unsplash
그렇다면,
왜 유창한 달변가의 말보다 어설픈 눌변가의 말이 때론 더 와 닿을까?
왜 엄마 말 안 듣고 이불 밖으로 겉돈 이들의 발자국이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내는 걸까?
과연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고 발을 움직여, 결국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리고 난, 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노래를 잘하는 방법'을 찾아보면 공통적으로 '복식호흡'을 꼽는다. 노래할 때 목이 아니라, 배에 힘을 '빡'주고 소리를 내야 한다고 지식인들은 입을 모은다. 그런데 확실히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내면 뭔가 더 깊은 소리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은 든다. 음정, 박자는 차치하더라도.
생각해보니 나를 비롯,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생목에 의존하며 소리 지른다. 목으로만 부르는 노래는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순 없다. 그런데 기교는 없지만, 가사에 감정을 이입해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는 듣는 사람의 가슴까지 전달돼 그 애잔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성악가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소리가 뱃속 장기들을 뒤흔드는 듯한 전율까지 선사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소리가 나오는 곳(시작점)에 따라서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곳(도착점)이 달라진다는 결론이 된다.
목에서 나온 소리는 상대의 목에 도달한다.
가슴에서 나온 소리는 상대의 가슴에 도달한다.
배에서 나온 소리는 상대의 배에 도달한다.
무릎에서 나온 소리는 정형외과에 도달한다.
이 결론에 의하면,
달변가보다 눌변가의 말이 가슴에 더 와 닿을 수 있었던 건, 말이 '시작되는 위치'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잘 생각해보면, 말을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나운서나 정치인, 방송인, 변호사, 기자' 등 이들의 말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들은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을 유창하게 말한다. 즉, 말의 꼬임이나 막히는 등 실수가 없다. 차가운 머리를 통해 목에서 나온 말이다. 머리+목에서 나온 말(사실/메시지)은 상대방의 머리를 거쳐 목에서 멈춘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가슴까지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눌변가는 다르다. 논리적이고 유창하게 말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가슴을 울리는 말을 하는 몇몇의 눌변가는 그들 스스로가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의 논리적인 구성이나 스킬에 의존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보다 본인들이 마음으로 느낀 것에 대한 설렘이나 떨림을 자분자분 말에 담아낸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 마음에 고스란히 물들이게 된다.
그러나 가슴으로 말하는 눌변가도 딱 가슴까지다. 가슴을 움직인다고 해서 상대방의 발까지 움직일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감동적인 말은 휴지 몇 장이면 끝난다.
어쩌다 효자가 울게 되었을까?
불효자가 취업시장에서 웃는 꼴을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도대체 왜, 엄마 말 안 듣고 위험한 이불 밖으로 뛰쳐나간 이들이 더 취업의 질과 업무 만족도가 높은 것인가. 의외로 간단했다. 그들이 돌아다닌 발자국이 스스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나 공기업 등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아무튼, 인사담당자들과 면접관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지원자의 지식도, 소통능력도 아니다. 그것은 신생아 발도장 찍듯 꾹꾹 눌어 찍어온 지원자의 발자취다. 쉽게 말해서 수많은 시도와 실패, 극복 그 속에서 단련된 굳은살, 성취 등 발(행동)에서 나온 역동적인 소리가 상대방의 귀, 가슴, 그리고 발까지 움직이게 만든다.
요약하면, 자신을 어필하고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당신의 발자취에서 나온 말을 들려줘야 한다. 그러면 돌아서는 상대의 발도 돌려세울 수 있다.
집 나간 며느리 불러들이겠다고 가만히 앉아서 전어만 굽다가는 자칫 인생이 다 타버릴 수도 있다.
Photo by Deny Abdurahman on Unsplash
마음이 흔들리고, 발이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흔히 말을 청산유수같이 잘하는 사람을 일컫어 '말발이 세다', '말발이 있다'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말발'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을 따르게 할 수 있는 말의 힘'이다. 다시 말해 내 말대로 상대를 움직이는 힘이다. 그래서 말발이 세다는 말은 '말로써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강하다'라는 말이다.
'말발'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말'이 아니다. '기세/힘/효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발'에 있다. 즉, 말발의 원동력은 발이다. 그리고 그 '-발'의 근원은 '발(足)'이다.
발은 사람이나 동물의 다리 맨 끝부분이다. 신체를 지탱하기도 하고, 말(주장)을 지탱하는 힘(근거)이 되기도 한다. 근거가 튼튼해야 주장이 탄탄해진다.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면
움직여야 할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말고,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낫다.
실컷 발로 뛰며 개고생 해보고, 상대에게 딱 한마디만 멋지게 날려보자.
"야, (내가 해봤는데) 너도 뭐든 할 수 있어!"
야나두 TV 광고 중에서.
"I don't sell. People buy from me."
단타투자의 고수, 증권왕, 월가의 이단아로 유명한 '제럴드 로브'의 말이다. 화려한 전달력은 물건을 팔 수 있다. 하지만, 욕망을 해결해 줄 공감은 물건을 사게 만들 수 있다. 팔지 말고, 사게 하라.
어떻게? 당신의 발자취가 담긴 경험들로 상대방에게 없던 환상과 욕망을 심어주면 된다. 평소 세단(승용차)만 고집하던 사람에게 SUV 차량의 기능적인 강점만 어필하면 안 된다. 직접 SUV 차량을 구매해서 캠핑도 하고 대자연을 만끽하며 가족과 함께한 추억들을 리얼하게 들려주면 된다.
차를 팔지 말고, 경험을 사게 하는 것이다.
우유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 스피치를 비롯한 '말하기'도 잘하기 위해서는 빠르게든 느리게든 움직여야 한다. 움직인다는 건, 발이 이동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딛는 발자국 수만큼 당신의 말발도 세진다. 당당하게 두 발로 증명할 것. 그래야 듣는 사람도 두 발이 움직인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등병 때,
선임들에게 '발에서 나온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선임이 오늘 안에 제초 다 끝내라고 했을 때, "그건 힘들 거 같습니다." 대신
일단 미친 듯이 풀 뽑아 보고 "오늘 해봤더니, 10% 남았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오전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선임이 족구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싫습니다." 대신
얼른 얼음물을 챙기며 "네"라고 말했더라면,
파란만장했던 내 군생활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글. 위트코치 이용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