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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코치 이용만 Apr 02. 2020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는 고수의 경청법

‘3마리 개’를 버려야 들린다.

‘3마리 개’를 버려야 들린다.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는 고수의 경청법]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이것은 무소유인가 소유인가. ‘필사즉생, 필생즉사’이것은 어떤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너머의 핵심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를 파악하는 일은 개인의 경험, 역량,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수능에선 타인의 말과 글의 핵심을 찾는 데 혈안이다. 문제는 제대로 집중해서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그 속의 숨은 진실만을 찾으려 하는 건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Valeria Boltneva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종종 금요일 저녁엔 아내와 집 앞 치킨집에 간다. 언제나처럼 같은 메뉴를 시키고 기다린다. 치느님이 우리 테이블 위로 강림하시기까지 기다림은 7년째 '다이어트'를 하는 아내를 '다이너마이트'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여하튼 치킨은 나왔고 우리의 배도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먹던 중, 아내에게 이번 달 마지막 주 독서모임에서 '저자 특강'을 하는데, <일독일행 독서법>의 '유근용' 저자가 온다고 말했다. 한참 치킨 '발골'을 하던 아내는

“응? '유기농'이 온다고?”




흔히 이야기하는 사람을 화자(話者), 반대로 듣는 사람을 청자(聽者)라 일컫는다. 그리고 스피치를 청자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래야 좋은 커뮤니케이션이고 상대방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만 계속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계속 듣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영원한 아군도 적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 청자는 없다. 결국 ‘화자와 그다음 화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곧이어 말할 내가 잘 말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말을 듣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 말을 편하게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또 듣는 것을 잘하냐? 그건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말을 잘하길 원하고 그 해결책으로 각종 수사법이나 기교 위주의 지름길만을 찾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필요한 단계가 있다. 그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즉 ‘경청’이다.

https://unsplash.com/photos/SIZ66vF4FKA

경청(傾聽)은 ‘기울 경’에 ‘들을 청’자로,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다. ‘들을 청(聽)’이란 한자를 보면 귀 이(耳), 임금 왕(王), 열 십(十), 눈 목(目), 한 일(一), 마음 심(心)으로 이뤄져 있다. 상대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귀를 왕처럼 크게, 열 개의 눈으로 상대방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즉 상대의 말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마음까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말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래리 킹<미국 토크계의 전설, ‘대화의 신’ 중에서.>


그렇다면 왜 말을 잘 하려면 오히려 말을 잘 들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말을 잘하고 싶어졌다.'라고 생각해보자. 말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면 된다. 그럼,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어떻게 알까? 질문을 하면 된다. 그럼 질문은 어떻게 하나? '하와이(How,Why)'로 한다. 그럼 대답한다고 한들 어떻게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고, 원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까? 경청하면 된다. 어떻게 잘 들을 수 있을까.




그전에 경청을 방해하는 이유부터 찾아 제거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누구나 자기 나이만큼 키워온 개 두 마리가 있다. 그 개의 이름은 '편견'과 '선입견'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경청이 힘든 이유에는 개가 한 마리 더 있다. '참견'이다. 경청을 방해하는 이유는 세 마리의 개 때문이고 이것들을 버려야 한다.


첫 번째, 편견이다. “합격 소식이 알려지고 입학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면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면서 입학을 포기한 숙명여대 성전환 신입생.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 언론들이 중국에 대한 과민반응. 

이러한 편견으로 인해 상대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안 좋은 방향으로만 해석 및 판단해버린다. 심지어는 상대가 입도 뻥긋하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상대방이 말할 기회조차 차단하는 때도 있다. 아무리 내 마음에 안 들고 함께 대화를 원치 않는 상대방이더라도 상대방은 나에게 억울함 혹은 의견을 말할 권리는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듣기 전까지는 모든 편견을 버리자.


두 번째, 선입견이다. 2009년 마케팅 전공과목 수강 중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졸다가 담당 여교수님께 소위 말하는 헤드락을 당한 적이 있다. 매번 강의시간에 지각을 일삼고 그로 인해 반장도 잘리고, 복장은 츄리닝에 맨 뒤에 앉아서 졸기만 하는 나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나 보다. 그러다가 학기 중간에 발표평가가 있었다. 정장을 잘 차려입고 신나게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당연히 청중과 교수님은 박장대소로 시작해 기립박수로 끝났고, 그 뒤로는 츄리닝을 입고 가도 헤드락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는 전공과목 평가에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누구에게나 본인의 신념이 있다. 신념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을 결정하며 이러한 신념이 선입견이 되고, 이는 자칫 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말을 하기도 전에 미리 판단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과거 일련의 경험된 행동들을 통한 섣부른 예단으로 인해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의 결론을 미리 혼자 결정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기 전에 미리 판단하게 되면서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또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와 결부시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면 상대방 말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배척하고 상대방의 주장은 아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단 반박할 무언가를 찾을 궁리만 속으로 하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온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세 번째, 참견이다. 2016년 봄, 어느 운수 좋은 날에 갑자기 집으로 <교통법규 위반차량신고 관련 사실 확인요청서>가 날아왔다. 확인해보니 방향지시등 위반이다. 반성과 동시에 그 뒤로 소위 말하는 '깜빡이'를 안 넣고 추월 혹은 끼어들기를 하는 차량 운전자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방향지시등을 먼저 넣고 추월하고, 웬만하면 끼어들기는 자제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벌금 6만 원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말을 할 때도 참견하지 말고, 끼어드는 것을 자제해야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꼭 상대의 말에 끼어들어야 할 것 같으면 미리 깜빡이(신호)를 넣고 들어가자. 벌금이나 벌점은 없지만 그것이 매너다. 그리고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하지 않던가.

흔히,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고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싶다면 참견하지만 않아도 반절은 성공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사람은 누구나 말을 듣는 것보다 말을 하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우며 에너지와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만히 듣지 못하고 자꾸 상대방의 말에 끼어들고 비교하고, 아는 체하고 반박하고, 우기고 심지어 꾸짖고 충고까지 한다. 이건 경청을 떠나 소통을 떠나 사람으로서 사람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비록 내가 잘 알고 있어도 혹은 내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일단 심호흡 한번 하고 더 들어보자. 그러면 들리기 시작할 것이고 들을 자격을 갖춘 셈이다.


정리하면 ‘편견, 선입견, 참견’을 버림으로써 경청의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비로소 배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넬슨 만델라’의 말로 대신한다.

https://unsplash.com/photos/H4l6KUy3E6w

“대화의 첫 규칙은 듣는 것이다. 말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대담 중 내가 하는 말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 깨닫는다. 오늘도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저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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