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놓고 엄마가 되는 시간
2017년 어느덧 사업 2년 차, 첫 아이가 생겼다. 난 출산 3일 전까지 운동센터를 지켰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나는 노트북을 먼저 열었다. 엄마가 될 준비보다 일을 손에서 못하던 시절이었다.
조리원에서 아이를 처음 내 품에 안던 날, 눈물이 쏟아졌다. 이 아이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겁이 났고 두려웠다. 한없이 평안한 아이의 눈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막막함과 미안함에 난 3일 내내 울기만 했다.
남편은 그런 내 옆에서 말없이 눈치만 살폈다. 내 불안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봐.
나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로서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출산 후 50일 만에 센터로 복귀했다.
회원들은 ‘좀 더 쉬지, 애는 어쩌고 나왔어’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고 나는 매일 밤 아무도 몰래 혼자 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아이에게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직원이 갑작스레 퇴사 의사를 밝혔다. 현실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현실의 어려움은 계속 나를 힘들게 볶아댔다.
아이가 태어난 지 74일 되는 날. 낯선 보육교사 품에 아이를 맡겼고, 나는 눈물 콧물을 닦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엄마가 된 지 석 달도 안 되어 나는 또 사회 속으로 떠밀렸다.
그런데 더 마음 아픈 건, 그 어린 아기가 낯가림도 없이, 너무 잘 적응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두고 가도 울지 않았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가슴 아팠을까.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시간들이
그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하는 걱정이 온통 나를 감쌌다.
아이 두 돌 무렵, 남편은 대전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우리는 주말부부가 되었고,
하루하루 전쟁 같은 일정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아이가 수족구에 걸렸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영원한 내편 친정 아빠에게 전화해 부탁했다.
“아빠, 애가 아파서… 일주일만 저희 집에서 같이 있어주실 수 있으세요?”
무뚝뚝한 아빠는 다음 날 새벽 첫차를 타고 올라오셨다.
‘한 마을이 전부 애를 써야 아이를 키운다’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아무 연고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일까지 하는 워킹맘으로 산다는 건 참으로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2년 후, 우리에게 두 번째 아이가 찾아왔다. 유산 후 어렵게 만난 소중한 생명이었다.
이번엔, 난 전과 다른 선택을 했다. 일이 아닌, ‘쉼’을. 그렇게 9년간 운영한 센터를 과감히 정리했고, 남편과 함께 세종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2019년 여름, 34살의 내게도 평온이 찾아왔다.
수능 이후 처음 느껴보는 진짜 ‘쉼’이었다. 첫째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고, 뱃속 둘째와 교감하는 시간들.
그제야 비로소 진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도 종종 되묻는다. 왜 첫째 때는 그렇게 놓지 못했을까. 왜 둘째 때는 다시 일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워킹맘도, 전업맘도 둘 다 겪어봤으니까. 어떤 삶이 더 낫다고 쉽게 단정해서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선택이 그 시절의 나에게는 최선이었다는 걸.
그리고 지금,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노련해지고 있는 엄마라는 걸 말이다.
앞으로도 삶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 중심엔 단단하게 새겨진 나만의 육아와 삶의 철학이 있다. 나처럼 흔들렸던, 지금도 묵묵히 버티고 있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지 모른다. 매일을 간신히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하루가 지난할 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께 이 말을 전하고 싶다.
흔들려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고.
서툴러도 괜찮다. 눈물 흘려도 괜찮다. 실수하고 눈물 흘린 만큼 우린 더 단단해질 테니까.
오늘도 엄마로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 그리고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