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 일본에 갔다. 아는 분이 계신 ‘치바현’에 작은 일본 마을에서 약 3주를 그 집에 얹혀 지냈다. 때론 다 같이 한국 음식도 해먹기도 하고 현지인들이 가는 동네 맛집을 따라 와규와 초밥을 양껏 먹으러 다녔다. 가끔은 운전해주시는 차를 타고 근교로 나가서 전혀 모르는 일본어로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듣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곳은 '신규사'라는 도쇼쿠에 있는 작은 마구간이었는데 이곳에는 ‘신자루’라는 아주 유명한 세 원숭이 조각이 있다.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린 원숭이. ‘예의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했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날을 기억하고 있는 건, 일본어로 한번 한국어로 한번, 다른 언어로 두 번 들었던 설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그 다음 외국행은 캐나다 빅토리아로 일 년 동안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였다. 영어공부 때문에 그곳에 갔기에 한곳에 오래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니 나에게 여행은 머무르는 것이 되어 버렸다. 짧으면 2박 3일에서 일주일짜리 여행을 가는 것이 낯설었고 무서웠다. 천천히 그곳을 알아가고 갔던 길을 몇 차례나 반복해 가며 새로운 지름길을 찾아내고 매일 걷던 거리에 있는 단추 가게 하나를 우연히 발견해 행복해하는 그런 것만이 여행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갔던 모든 장소들은 말이 통하거나 그곳을 잘 아는 누군가가 친절하게 그곳을 설명해 주었던 기억뿐이었다. 그 후에 갔던 여행들도 같은 장소를 그곳을 잘 아는 사람과 방문했었거나 친구가 공부하고 있던 호주에 한 달 동안 신세를 지는 식의 여행을 했다. 여행을 동경했지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나에게 여행은 캐나다에 가는 것이거나 어딘가에 한 달 이상 머무르는 일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을 동경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두려움은 여행에 대한 갈망만 높이고 가지 못한 후회로 내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신혼여행이 첫 해외여행의 남편이 세계여행을 가보자고 했다.
늘 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나를 사랑해서, 자신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새로운 경험에 스스로를 던져보고 싶어서 가고 싶다고 했다. 언어도 모르고 여행도 모르지만 용기를 내는 그의 손에 이끌려 세계여행이라는 걸 떠났다. 정확히 내 나이 서른에.
서른이 되어서야 시작한 우리의 여행은 역시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일이 잦았다. 200일을 여행했지만 14개 국가 밖에 가지 못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한나라에 한 달쯤 지내거나 한 지역에 2주 동안 있었던 적도 있었다. 단골 식당을 만들고 오늘은 아래에서 위를 내일은 전망대에서 아래를 다르게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마로는 그런 여행을 마음에 들어 했다. 여행을 처음 왔지만 느리게 그곳 사람들이 뭘 먹고 다니는지 언제 출근하는지, 어디서 쉬어 가는지를 관찰하고 싶어 했다. 내가 했던 이십 대의 여행과 다른게 있다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조금 위험한 지역도 여행했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그가 있어서 무섭지 않았고 마로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나에게 물어가며 그 상황을 돌파해 나갔다. 여행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웠던 나와, 여행이 뭔지 모르지만 용감했던 마로가 30여 년의 다른 삶을 여행이라는 강렬한 실로 단단히 묶어갔다.
이 이야기는 서른에서야 처음으로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본 여자와 서른둘에 처음 아내와 해외여행을 떠난 남자의 이야기이다. 서른쯔음엔 이십 대에 경험한 것을 가지고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쯤 방황의 길의 올랐다.그럴 수도 있다. 삼십 대가 되었지만 처음인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아갈 방향을 몰라도, 어떤 것을 처음 시작해도 괜찮다. 여행이 끝나고 3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으로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다. 삼십 대의 모든 처음을 응원하며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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