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3일 차 아침이다. 3박 4일이 이렇게 짧았던가. 어제는아빠가 원하던 푸껫의 석양을 보기 위해 아이들이 희생했고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오늘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다. 2일 차에는 뜨거운 햇살 탓에 해수욕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구름이 많아 흐려진 지금이 물놀이를 하기 가장 좋은 날씨다.
오후 12시. 숙소에서 수영복을 미리 갈아입고 방타오 해변으로 향한다.구름 가득 찬 하늘이 태양의 존재를 지우개로 지운 듯 맨 눈으로 찾으려 해도 정확한 위치를 발견할 수 없다. 마치 흰색 도화지에 회색 포스터물감을 부어 놓은 듯하다. 태양이 없는 푸껫의 풍경은 흑백의 수채화를 보는 듯 그림의 맛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지만 물놀이를 하러 온 아이들에게는 바다에 젖으나 하늘에 젖으나 매한가지. 미리 챙겨 온 비치타월을 까는 것으로베이스캠프는 간단히 설치 완료됐다. 푸껫은 해수 온도와 외기 온도가 체온과 차이가 없어 물놀이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또 모래는 곱고 발을 다치게 할 유리병이나 날카로운 쓰레기도 눈에 띄지 않아 맨발로 뛰어다녀도 아프거나 위험하지 않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파도를 끊임없이 해변으로 밀어 올린다. 거대한 파도에 몸을 실어 몸으로 파도를 탄다. 대부분 서양 가족 단위 여행객들로 햇살이 없어서인지 어제보다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과 태닝을 하며 편안한 휴일을 즐기고 있다. 파도는 높지만 물은 깊지 않아 거대한 천연 자연 파도풀이만들어졌다. 어른, 아이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즐거운 표정이 만들어지는 오후 풍경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아이들은 3시간을 쉬지도 않고 놀다 보니 피부도 따갑고 쓰린 모양이다. 때마침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며 파도가 앞과 뒤 옆에서 몰아 친다. 밀려드는 파도와 빠지는 파도가 겹치니 파고가 높아져 몸이 감당할 수 없다. 잠잠했던 바다가 순간적으로 여기저기서 일렁거린다. 안전을 위해 물밖으로 나와 자연의 거대한 힘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지만 비쩍 마른 작은아이는 마른 장작 불태우듯 물놀이에 집중했다. 오후 4시, 호텔에 돌아와서도 징징대며 아쉬워하기에 루프탑 수영장에 올라가 마지막 불씨까지 하얗게 불태운다.그렇게 소중한 나의 시간을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 사용했고 최선을 다했기에 아빠로서 뿌듯함이 가득했다.
지친 몸을 뜨거운 샤워로대충 풀고, 2개 남은 컵라면 중 하나를 뜯어 요기하려는 순간 선잠이 들었던 작은아이가 라면 냄새를 맡고 일어난다. 큰아이가 질세라 마지막 남은 컵라면은 자기 몫이라며 미리 챙겨간다. 한나절 내내 함께 해 주었지만 컵라면 하나도 보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니 배고픈 갓난아이처럼 화가 치민다. 먹어보라는 말도 없다. 남김없이 먹은 후 생각보다 맛이 없다며 다시 자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다.
아무래도 3일 중 2일이 비가 와 제대로 된 석양도 못 보는 터라 속이 더 부글 된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Last Supper'에서 작은아이는 라면을 먹어 배 부르다며 비싼 저녁을 남기는 것을 보고 인내의 임계점이 초과되어 폭발해 버렸다. 와인은커녕 맥주 한잔 하자는 아내의 말에도 대꾸할 기분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한 저녁식사는 제대로 망쳐버렸다. 방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내일 먹으려 아껴둔 딸기우유 2개를 냉장고에서 꺼내보란 듯이 쭉쭉 한 번에 빨아먹어버린다
최고의 휴양지 푸껫에서 컵라면 하나로 빈정 상할 줄 예상치 못했다. 멋진 디너와 곁들일 와인도 미리 생각해놓았지만 기껏 혼자 딸기우유만 먹는 처지가 되었다. 아직 소중한 아침이 남아 있지만 틀어진 기분이 밤새 나아질지 모르겠다. 눈치 없는 아이들과 속 좁은 아빠로 소중한 푸껫 가족여행의 밤은 그렇게 흐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