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의 서막이 올라가는 것일까. 아침에 흐린 날씨를 본 것이 얼마만일까. 우산이 필요 없을 만큼 쏟아지는 비가 발가벗어버린 태양에 노출되는 것보다 낫다. 비는 언제 내릴지 알 수 없지만 비에 온몸이 젖을 각오로 외출 준비를 한다. 오늘은 장소를 정하지 않고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버스가 이끄는 방향대로 계획 없이 가보기로 한다. 애증 하는 8밧 버스는 목적지와 상관없이 8밧만 내면 종점까지 갈 수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안성맞춤이다.
아침 시간이라 대형 쇼핑몰도 여행자 거리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정류장에 따라 내렸다. 모자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로컬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천천히 주변을 걸어 나간다. 큰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왔지만 예상치 못한 큰 호텔 주변으로 여행자 거리와 상점이 보인다. 여행의 열기로 밤새 뜨거웠을 거리. 한두 방울의 비로 열기가 이내 식어간다. 길 옆으로 오토바이 기사(랍짱)가 클랙슨을 누르며 호객하지만 모른 채 우산을 펼쳐 들어 숨어버린다.
30분을 걸었을까. 거대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아침시장이 열려 있다. 비싼 콘도가 아닌 서민을 위한 임대 아파트단지로 내가 찾던 로컬의 향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제철 과일과 해산물, 채소가게, 반찬가게, 도시락, 음료 따위를 노점으로 판을 깔아 놓았다. 무더운 환경 탓에 낮보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기에 잠옷차림으로 늦은 식사를 사러 나온 주민들이 많다. 지내고 있는 주택단지(무반)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출근 준비로 분주한 것과 달리 이곳은 10시가 지난 늦은 아침이지만 여전히 피곤한 새벽 같은 분위기가 이색적이다.
본격적으로 천둥소리와 바람이 불어오니 상인들은 거대한 파라솔을 펼치며 폭우에 대비한다. 이제 서둘러 가까운 피난처 카페를 찾아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시장 근처라 마땅한 카페도 찾기 어렵다. 마을 입구로 들어올 때 봤던 로스터리 카페가자꾸 끌려 오늘의 피난처 카페로 정해보았다. 도착하니 때마침 퍼붓는 비가 커피의 맛을 한껏 끌어올려줄 기세다.
메뉴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로스터리 카페답게 자체 블랜딩한 커피가 눈에 들어온다. 보통 2가지 종류의 아라비카 커피와 로부스타를 블랜딩 하지만 이곳은 아라비카 원두 3종을 블랜딩 하여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참을 궁금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 에티오피아, 케냐, 치앙라이 도이창 아라비카 커피를 블랜딩 했다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간단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 바리스타 앞 바 테이블에 앉아 향기 좋은 커피를 기다린다.
완성된 커피를 내어 주며 자체 블랜딩 커피의 flavor note와 taste note로 소소한 태국 커피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취급하는 커피의 품종, 로스팅 단계, 방법, 추출 방법 등 다양한 자신만의 커피 철학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인도네시아 코피 루왁과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추출해 시음을 권했을 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치도 없이 점심시간이 넘어서야 시계를 확인하고 겨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80밧(3,000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에 코피 루왁과 블루마운틴을 시음할 기회를 제공한 방콕 외곽 로스터리 카페의 바리스타는 세계 최고의 카페만큼 커피에 진심이었다. 비를 피해 들어온 뜨내기 외국인 손님에게 최고급 커피를 직접 추출하며 서비스하는 로스터리 카페. 자본을 위한 커피가 아닌 사람을 위한 커피를 음미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