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연습장

태국 치앙마이, 코코넛 바나나 구이

살림남의 방콕일기 (#137)

by 김자신감


치앙마이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감성'이다. 혹시나 감성 없이 이곳을 여행하러 온다면 치앙마이 여행이 괴로울 수도 있다. 특히 '응팔' 드라마의 감성이 그립다면 치앙마이 여행이 천생연분,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치앙마이 올드시티 네모난 성곽에 나있는 해자를 경계로 아직 20~30년 전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골목 사이사이를 걷다 보면 이름 모를 예쁜 꽃들과 순둥한 들개, 방울 달린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고 담장너머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소리가 그렇게 정다울 수 없다. 학창 시절 중학교 교복과 빼닮은 모습에 근처 야외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재즈대신 한참을 듣고 있다.


오후 5시가 되면 한적한 골목 상점들은 마감준비를 한다. 낮동안 영업한 상점은 저녁의 해처럼 저물고 그 자리를 떠 오르는 달처럼 서민들의 야시장이 불을 밝힌다. 올드시티 남문 해자 근처로 매일 야시장이 선다. 이곳 야시장은 관광객들보다 하루의 일을 마감하고 저녁을 사러 들리는 로컬 시장에 가깝다.


늦은 저녁, 올드시티 남문 6시에서 5시 방향으로 천천히 야시장을 구경하는 찰나 입구에서 교복을 입은 여대생 두 명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호기심에 줄을 서보니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바나나를 꼬치에 구워 정성스레 굽고 있다. 바나나를 굽는 할머니의 모습에 생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화력이 다 떨어져 하얀 재로 변한 숯의 열기로 바나나를 굽는다.


잘 익은 바나나를 힘없는 주름진 손으로 밀대를 이용해 꾹꾹 누른 후 코코넛 밀크를 봉지에 담는다. 갑자기 미리 주문했다던 중국인 관광객이 여대생이 수십 분 기다렸을 귀한 코코넛 바나나 구이를 새치기하듯 날름 모두 사가져 가 버렸다.


구워 먹는 바나나는 고구마와 같은 식감으로 익히는 시간만 십 분 이상 걸렸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러 나온 터라 더 기다려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아이들의 눈치가 보이지만 할머니가 직접 구워주는 바나나를 언제 다시 먹어 볼 수 있을지 모르기에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던지 태국 여대생들이 자신들의 바나나 구이를 흔쾌히 양보해 준다. 등이 굽은 할머니의 그리움에 기다리고, 여대생들의 순수한 배려심에 따뜻해진 코코넛 바나나 구이를 두 손 귀하게 봉지채 들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갈 수 있었다.


그때 한두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하늘을 보니 구름이 몰려온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후두두 내리는 빗방울. 이 정도 빗방울이면 이미 식어가는 숯을 꺼뜨려 버릴 기세다. 나에게 양보했던 여대생들의 따뜻한 마음과 할머니의 굽다만 바나나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그렇게 한참을 아이들과 편의점 천막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얄미운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나를 향한 원망의 눈으로 어떻게 좀 해봐라는 무언의 압박을 해온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피자집으로 간신히 들어왔지만 이미 온몸은 비로 다 젖어 있었다. 아이들이 먹을 피자만 주문하고 나는 양보와 향수가 잔뜩 담긴 코코넛 바나나 구이를 저녁으로 접시에 담았다.


부드럽고 고소한 코코넛 밀크와 군고구마처럼 달달한 바나나 구이를 먹으니 비에 젖어 추웠던 몸과 마음이 금세 따뜻해진다. 10밧(400원) 짜리 바나나 구이가 예상밖으로 든든하지만 배고픈 청춘들의 귀한 저녁을 뺏어 먹은 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다행히 식사를 마치니 비도 그친다. 과연 여대생들은 나에게 양보한 바나나를 사갔을까? 등 굽은 할머니는 비를 피해 바나나를 잘 구웠을까? 어느새 비로 서늘해진 치앙마이의 골목사이로 초승달이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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