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온 택배

방콕, 가족은 떨어져 있어야 제 맛 (#2)

by 김자신감


한국에서 배로 붙인 짐이 왔다. 7월 중순에 태국으로 보냈지만 통관지연 때문에 거의 한 달이 훌쩍 넘어 도착했다. 대부분이 아이들 책이라 짐 쌀 때 대수롭지 않게 빈 공간이 생길 때마다 대충대충 넣었던 조미김, 고춧가루, 미역, 다시마 따위가 이렇게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한국과 태국은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튼튼했던 우체국 종이박스가 너덜너덜하게 온 걸 보니 그동안 많은 풍파가 있었던 모양이다. 16개의 택배박스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듬직한 전우가 있다면 압력밥솥과 기타이다. 그들은 지친 나를 구하러 역전의 용사처럼 거친 전장인 이곳까지 왔다.


밥솥은 큰아이가 태어나면서 샀던 10인용 대용량 전기압력밥솥. 식구도 작은데 큰 밥솥을 샀다고 10년 넘게 어머니와 아내에게 구박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 치킨 2마리를 뜯는 큰 아이의 왕성한 식욕을 감당하기에 안성맞춤. 더 이상 눈칫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듯 12년 산 밥솥이 여전히 건제하게 무거운 압력추를 씩씩거리며 태국에서도 우리 가족을 밥상을 책임져 줄 것이다.


기타는 6년 전 지인에게 7만 원을 주고 산 오래된 중고 기타. 여러 외국에서 함께해 외로운 시간을 인내해 주었고, 지금은 태국에서도 함께 있어줄 동료이기 때문이다. 비록 2번 줄을 감는 튜너 볼트가 빠져 헐겁고 배를 타고 건너온 탓에 녹이 나 뻑뻑해질 대로 뻑뻑해진 기타지만 그 기타가 좋다. 다시 줄을 감고 곰팡이가 낀 줄을 닦아 올드하고 볼드한 목소리를 내게 해 줄 생각이다.


밥솥과 기타는 낯선 타지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동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려움과 외로움을 함께 한다는 것처럼 힘이 되고 고마운 일은 없다. 열국의 나라에 온지도 한 달이 다되어 간다, 최근 감기 몸살로 온 가족이 고생한 터라 한국에서 온 택배가 지원군 마냥 든든하다.


이렇게 믿음직한 밥솥과 기타를 오후 늦게까지 닦아 주고 기름칠해 주었다. 오늘 저녁은 더 이상 누룽지 탄 냄비밥이 아닌 윤기가 흐르는 따뜻한 압력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타지에서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줄 기타가 옆에 있어 든든하다. 이제는 무서운 왕도마뱀이 문 뒤에 숨어 우리를 놀라게 해 좌절시키려 들더라도 더 이상 겁먹고 도망가지 않으리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태국의 8월 과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