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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신감 Sep 23. 2022

방콕, 리얼한 폭우 속 귀가 하기

살림남의 방콕 일기 (#34)


방콕의 한가로운 토요일 오전, 즐거운 주말 모처럼 편하게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큰아이는 모바일 게임에 빠져 질문을 해도 들리지 않는 과몰입 상태, 작은아이는 한국에서 즐겨하던 슬라임을 태국에는 만지지 못해 유튜브 영상으로 대리만족 상태, 아내는 회사의 일이 많은지 연신 노트북을 뚫어져라 다보며 흐릿해진 영문자판을 두들기는 워커홀릭 상태, 나는 라디오에 나오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1악장을 들으며 글감을 찾기 위해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분노에 찬 관찰자 상태다. 한자리에 함께 있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반적인 현대판 가족의 모습이다.


그날 오후, 큰아이가 무슨 일로 나에게 "오늘은 밖에 안 나가요?" 물어온다. 내가 먼저 미끼를 덥석 물 수는 없는 법,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려고 하는데, 왜 그래?"라고 대답하니 학교 교복에 까만색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데 신발이 미끄럽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새로 사고 싶다는 말이었다. "뭐... 딱히 내키진 않지만, 필요하다면 따라 가줄 수는 있어."라고 밑밥을 뿌린다. 이렇게 해야 모든 일의 진행이 아빠 주도가 아닌 아이 주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우기철이라 매일 저녁이면 비가 오기에 오후 1시경 서둘러 집 근처 쇼핑몰로 향한다. 집 근처라 하지만 버스 타고 20분 거리. 집에서 나와 도착하는 시간까지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불편한 여정이지만 큰아이는 불평 한마디 없다. 쇼핑몰 내 신발 매장을 다 둘러보니 시간이 2시간을 훌쩍 넘긴다. 마음에 드는 신발은 비싸거나 사이즈가 없어 실망한 큰아이가 다음에 다시 보고 사자며 돌아선다. 하지만 이곳까지 나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법. 카페에 들러 한 시간 충전을 하고 보물 찾듯 다시 신발을 찾기 시작한다.


우리가 직접 찾는 데는 한계가 있어 쇼핑몰 내 백화점 스포츠 의류 매장 직원에게 블랙 슈즈를 찾는다고 물어보니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삼선 운동화를 가지고 나온다. 신어본 아이의 눈치가 그렇게 나빠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을 보니 2,500밧(10만 원)이다. 태국에서 의류 신발이나 공산품 가격은 한국과 비슷한 물가. 직원분께 스쿨슈즈로 신을 거라 가격이 1,000밧(4만 원) 대에 할인하는 신발이 있냐고 물어보니, 우리에게 딱 맞는 신발을 찾아와 주신다.  


그렇게 4시간여 만에 온 쇼핑몰을 다 뒤지며 신고 벗기를 반복해 원하는 가격 1,350밧(5만 원), 색상과 디자인, 착용감 모두 큰아이 마음에 드는 신발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활기를 찾은 큰아이는 말이 많아지며 원하는 신발을 찾게 해달라고 마음속 기도를 많이 했다고 힘들었던 속을 털어놓는다. 큰아이 주도적으로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의 제품을 스스로 찾아 선택했다는 점에서 오늘 외출의 목표는 대만족이다.


시간이 훌쩍 흘러 저녁 7시. 신발을 고르느라 너무 집중했던 탓일까. 서둘러 밖을 쳐다보니 밖은 전쟁통이다. 주위가 번쩍번쩍 거리며 포탄이 터지듯 쾅쾅되며 하늘에 쏟아지는 총알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아차 싶다. 이 정도 폭우면 잠잠해지더라도 도로 침수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수 없다. 이럴 때는 먹으며 고민하는 게 국룰. 큰아이가 좋아하는 일본 라멘집에 자리를 잡고 플랜 B와 C를 생각해 보았다. 플랜 B는 쇼핑몰의 마치는 시간은 저녁 8시 30분. 약 1시간 30분의 시간이 있다. 그때까지 비가 그쳐준다면 밤늦게라도 집에는 갈 수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호텔에서 자고 갈 수밖에 없다. 플랜 C로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호텔도 미리 검색해 놓았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저녁 8시쯤 밖으로 나와 보니 다행히 비가 확연히 줄었다.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보니 사람들로 인산인해... 다들 택시 어플과 버스를 동시에 기다린다. 큰아이가 "오늘 우리 집에 갈 수 있을까요?" 걱정스레 물어본다. 사실 그것은 아빠가 대신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다. 평소에 택시로 60밧(약 2,400원)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0밧(16,000원)에 불러도 택시는 오지 않는다.


그렇게 택시와 버스를 1시간 기다리며 서있었을까. 다시 빗줄기가 강해진다. 그래도 꾸준히 택시 콜을 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다행히 콜을 받는 택시 한 대가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정류장 앞에서 택시 한 대는 위기에 놓인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오는 밀러 대위 같다. 그래도 오는 중간에 취소될 수 있는 상황,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자. 그렇게 기나긴 20분을 기다려 무사히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쇼핑몰 올 때 왔었던 간선도로가 물이 다 잠겨 우회에 우회를 하며 우여곡절 끝에 저녁 10시경 집에 도착했다.


큰아이가 "오늘은 정말 엄청난 하루였어요."라며 그날을 한마디로 평가했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오늘 우리는 전쟁 한가운데 있었고 그래도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인생이 호락하지 않다는 삶의 교훈을 오늘 하루는 폭우로써 큰아이에게 몸소 경험하게 해 준 엄청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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