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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Mar 04. 2020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어?"

지난주에 대학 동문 선배님의 아버님의 부고를 들었다. 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급속도로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고 했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지인의 결혼 소식보다는 부고를 알리는 연락이 더 많아졌다.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으면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그와 동시에 내 부모님의 안녕 또한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00세 시대가 되어서 예순은 청춘이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예순을 넘긴 후부터 부쩍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지셨다. 엄마는 수년 전부터 이명이 심했는데 이런저런 검사를 해도 이유를 찾지 못해 기력이 약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급히 대학병원을 찾았다. 뇌 쪽으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하고 알게 된 것은 뇌혈관의 선천적 기형이었다.


'선천적'이라는 말은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들려서 나와 엄마는 꽤나 낙담했다. 이번 기회에 지긋지긋한 이명도 치료할 수 있길 기대했는데.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의사도 위험한 뇌 수술보다는 이명과 시력 저하를 견디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하니 우겨서 수술을 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나의 세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데다, '피곤하신 모양이지' 라고 생각할 만큼 무심한 딸이었다.


며칠이 지나 엄마가 하는 말씀이, 6남매 중 막내인 엄마는 외할머니가 엄마를 임신했을 때 아이를 지우는 약을 먹었다고 했던 게 기억나셨단다.

"그때 기형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아."

그 말을 하는 엄마의 표정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그 표정은 분명 선천적 기형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치료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에 대한 막막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새삼 엄마가 안쓰러웠다. 외할머니는 어째서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너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굳이, 당시에는 어렸을 엄마에게 왜 하신 걸까. 그럼에도 낳아서 너를 건강하게 길렀다는 것을 말하고 싶으셨을까.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막둥이 너를 낳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니'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으셨을까.


엄마는 상처 받았을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에게 그 기억을 꺼낸 엄마의 표정은 분명 상처를 받은 사람의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중학생일 때였나, 엄마에게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어?"라고 물은 적 있다. 그때 "당연하지.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딸이 어디 있어."라고 담담히 말했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의 엄마 얼굴에 겹쳤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원망스러울까. 아니면 6남매를 어렵게 키워내신 외할머니를, 뱃속에 생긴 생명을 끊어내겠다 모진 마음을 가졌던 외할머니를 그럼에도 깊이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자라면서 엄마에게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엄마에게 나의 하루 중에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전부 토해낼 때 "넌 왜 이리 말이 많냐, 시끄럽다!" 할 때도 있었고, 내가 씩씩 거리며 화낼 때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라고 심드렁할 때도 있었다. "성질 한번 고약해", "넌 대체 누굴 닮았냐.", "저 지랄 맞은 년." 엄마가 내게 퍼부은 상처를 기록하자면 몇 날 며칠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에게 좋은 엄마이다. 늘 함께 있고 싶고, 그러지 못해 늘 애틋하고, 항상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다. 나의 아이가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듯, 나 역시 엄마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조건 없는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 엄마가 나이 들어간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흰머리가 절반을 넘고, 손등에는 핏줄이 툭툭 튀어나오고, 발바닥은 거칠어져 비비면 석석 소리가 난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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