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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Aug 03. 2020

친구와 절교했다.

20년 넘은 관계의 끝에서 얻은 깨달음

친구와 절교했다. 브런치에 친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지 2주 만이었다. 다시 그 글을 읽어 보니 친구를 ‘에너지 뱀파이어’라고 칭한 것도,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한 것도 어쩌면, 이미 유통기한이 끝난 관계라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참 에너지 뺏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그 아이의 생각에 공감해주고, 고민 상담해주고 내가 하는 푸념에 대한 원치 않는 해결책들을 듣는 것이 피로했다. 알아서 필터링하라면서 상처되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을 감당하는 것도, 궁금하지 않은 그 아이의 아침 몸무게와 운동 시간, 취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도 버거웠다. 그럼에도 나의 유일한 학창 시절 친구이고 20년 넘게 유지한 관계라는 사실이 그 무게를 견디게 했다. 그 아이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진작에 끊어졌을 인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은 그 인연이 길게 이어져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으니 그 아이의 이야기는 남들의 그것보다 더욱 공들여 들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우정’이라고 말하기에는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지난주에 끝났다.  


20년 넘은 인연이 카톡의 차단 버튼 하나로 끊겼다. 처음에는 톡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읽씹’ 중이었다. 반나절 정도 관계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했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거리를 두는 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왔고 망설임 끝에 차단했다. 처음에는 그 친구가 보낸 톡의 ‘1’이 사라지지 않아서 내가 차단했음을 알게 될까 봐 마음이 쓰였다. 그다음에는, 진짜 우리의 관계가 끝난 것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고 카톡의 친구 목록에서 제일 먼저 뜨던 그 친구 프로필이 보이지 않자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친구가 전화라도 하면 받아야 하는지, 전화 수신도 차단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친구에게서는 문자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계속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동안의 관계도 복기했다. 어디서부터 묘하게 어긋나 있었는지, 어떤 것을 서로 용인해주기 어려웠는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는지 등에 대해 말이다. 돌아본 관계에서 나는 피해자였다. 친구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오래도록 피 흘렸지만 친구는 자기가 돌 던진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친구가 한 말과 행동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아서 ‘왜 그랬던 거냐’고 어렵게 꺼내놓으면 ‘내가 그랬어?’ 라거나 ‘내가 그때 힘들었나 보지.’로 끝났다. 더 따져 물을 여지도 남기지 않고 싹둑.

문제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상처 받고 있었지만 친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이 여러 번 되었고, 그러면서 내 나름의 방어막을 세우느라 친구의 감정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친구는 기분 나빠서 바로 잡아야겠다며 그런 순간들을 끄집어냈고 자기의 생각에 동의하라며 다그쳤다.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느냐. 나한테 한 말을 너한테 똑같이 돌려주면 너는 기분 나쁘지 않냐. 나를 오랫동안 봐온 네가 그럴 줄 몰랐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러니까 네가 인정해라 블라블라블라.


나는 분노했고 절규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꼴이 지금까지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과 너무도 같았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기를 바라는 나의 부모가 그랬고,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니 내 말이 옳다’는 상사가 그랬다. 나의 20년 지기 친구도 똑같았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기까지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알면서 그럴 순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질 때까지 ‘너까지 왜 그래?”를 쏟아내다가 제풀에 지쳐 굿바이 인사를 전하고 말았다.


이렇게 끝날 인연이었던 것을.

뭘 그리 애쓰며 붙잡고 있었는지.

속상하다기보다 허탈하고 허무했다.

한편으로는 왜 친구가 원한대로 말해줄 수 없었는지를 계속 생각했다. 내 안에 무슨 욕구가 있길래 친구의 생각에 표면상으로도 동의를 해줄 수 없었는지 말이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자아 성찰도 해보고 친구 마음도 어림잡아 보면서 열심히 생각해본 결론은 이랬다.


1. 나는 친구를 사랑했다.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었지만.

친구는 나와 참 달랐다. 자라온 환경도, 돈에 대한 생각도, 육아에 대한 논리도. 심지어 의식의 흐름조차 교집합이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를 잘 보완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과연 ‘보완’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는 특히 친구가 외로움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을 하찮게 여겼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네가 하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돈만 쓸 뿐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스트레스받는다고, 그거 풀 방법 찾는다고 돈지랄하는 거 너한테 도움도 안 되고 보기에도 불편하다고 꼬집어 주고 싶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 친구의 하는 꼴을 못마땅해하는 나의 태도는 전화 속 침묵을 타고 흘러넘쳤겠지. ‘네 방법은 틀렸고 내 생각이 옳아.’라는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침묵.


2. 나는 그 관계에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다지 좋은 친구도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에너지를 뺏기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위안을 얻고 있었다. 당연했다. 20년 넘도록 빼앗기기만 하는 관계라면 호구지, 친구가 아니다. 나도 얻은 것이 있어서, 그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친구는 나에게서 무엇을 얻었을까. 늘 조언과 공감과 위로를 원했던 친구는 그것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 내 딴에는 늘 최선이었지만, 늘 ‘내 딴’이었던 것이 이제 와 미안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긴 했을까. 분명 사랑한다 믿었는데, 생각보다 홀가분하다 이상하게도. 그리고 미안하게도.

너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락했을 법도 한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너도 내 생각과 같겠지.

지금이 쉼이 될지, 끝이 될지 모르겠지만 모쪼록 조금 덜 외로워하길 바랄게.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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