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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Aug 09. 2023

1도 없는 기다림

디지털 노마드가 쉬워진 시대를 살아가며(2021)

 산책 나온 김에 백화점도 들르자는 엄마의 제안에 흠칫했다. 어딘가를 들어가야 할 때면, QR코드나 인증전화가 필수다 보니 '지금 나에게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이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한소리 듣겠다 싶어, 충전 중이라 집에 놓고 왔다고 웅얼대는 나에게 제법 쿨하게 수기로 기입하면 되지라고 현답을 내놓는 엄마. 안도하던 찰나, 이내 한마디가 날아왔다.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스마트폰은 꼭 챙겨야 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이게 너 생명줄이야." 그녀의 발언은 상냥한 축에 속했으나,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멀뚱거렸다.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고 믿고 가르친 세대의 손에 '착붙'한 기기에 놀라며.

 재미나거나 유익한, 둘 다 아니지만 그럼에도 소비하는 콘텐츠들, 주변인 나아가 모르는 이들의 근황, 쇼핑, 소액결제, 삼성페이, 카메라, 길 찾기, 알람, 계산기, e-book, 음악 심지어 오늘은 몇 보 걸었나까지. 이 정도면 하루 일과의 전부를 '위탁'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로 인해 만족스러운 일들도 많았다. 그저 GPS 방향표시를 열심히 따라가고 몇 가지 검색어를 조합했을 뿐인데, 짐짓 내가 '길을 잘 찾고 독립생활도 여차저차 잘 꾸려나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

 그러나 애석하게도 스마트폰의 침투력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휘되었다. 내가 누린 효용만큼, 나의 고용자도 누린달까. 시간과 장소에 연연하지 않고 원격 통신을 적극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란 어쩌면 '퇴근이 없는 노동'과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내 컴퓨터 화면은 이미 해야 할 일로 충분한데, 왜 나는 사무실에서 스마트폰에 구동된 팀 메신저 방을 빠르게 살피고 대응해야 '일 잘하는 사람'이 되는 걸까.

 소속팀 특성상 퇴근 후의 연락에도 빠릿빠릿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질 즈음, 실무자로서 다른 회사에 장기간 영상 제작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나와 비슷한 또래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계약하자마자 나를 단체 메신저방에 초대해 짐짓 놀랐다. 그리고 전화나 이메일보다는 카카오톡을 통한 업무 및 피드백 전달을 선호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형식에 연연하지 않는 소통방식이 효율적이라 느끼면서도, 메신저로 첫 의견을 발송하기 전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요청 내용의 명확성, 정중함, 띄어쓰기, 발송 시간대까지 신중을 기했지만 내가 그들의 일상을 침범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발송하자마자 이내 빠르게 줄어드는 숫자는 지금도 불편하다.

 읽음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이메일도 매한가지다만, 어째 업무 카톡의 그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당장 급한 업무가 아니었다면 이메일로, 비격식이 용인되지 않았다면 문자메시지로 요청했을 거다.'라는 짐작 뒤에 다시 한번 마음이 무거워진다.(단체 카톡방 역시 결국 다자간 비격식이 용인된 관계기에 개설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때 '비격식 용인'은 상호 합의는 아닐 가능성이 대다수) 마치 1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각기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기기를 들여다볼 예비 수신자들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요새 퇴근 후 선선한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고 자전거 타는 재미에 빠져있다. 빠르게 어둑해지는 하늘 색상도 묘미지만, 가장 짜릿한 건 자전거 앞바구니에 스마트폰을 대충 구겨 넣고 없는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의 조언을 반쯤은 들었달까. 어렵지만 되뇌어본다. 1(일)을 더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1(원)하지도 않는 '1'을 기다리지는 말자. 진짜 급한 거면 전화 오겠지 뭐~ (쌩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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