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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옆버스 Aug 09. 2023

디카페인과 논알코올

취약점 대처법(2021)

 요새 나는 스트레스가 많다. 퇴근 후의 삶이 없었다. 방에 도착하고 얼마 남지 않은 몇 시간에 별다른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그냥 불부터 끄고 팟캐스트를 튼 채 잠들고, 새벽에 깨자마자 바로 출근하는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8월 내내 그랬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팀원 모두 바쁘고 인력이 부족한 상황인 게 빤히 보여 "아니에요", "괜찮아요"를 달고 살았다. 어느 금요일 아빠 차 뒷좌석에 타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부터 줄줄 났던 걸 보면, 사실은 괜찮지 않았나 보다.

'내 몸 내 마음 갉아먹으면서까지 잘할 필요 없다.' 가까운 사람들이 지쳐있을 때면 종종 건네던 위로의 문장이었는데, 정작 내가 제일 못 지키는 상황이었다.

글쓰기 주제 선정 차례도 까맣게 잊고 오늘까지 마감해야 할 일에 압도된 어느 오전, '이참에'란 마음으로 함께 글 쓰는 카페에 주제로 "스트레스, 취약점"이라 올렸다. 찌질하고 칭얼대는 것 같아 민망한 건 둘째 치고. 털어놓을 대상이 있을지언정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감정과 맥락 없는 사건들의 열거이기에 망설이던 것들. 글로라도 그냥 와다다 적어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여기서 내 취약점을 말해야겠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서론, 결론 그리고 제목이 잡혀있지 않으면 본론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분량의 글이든 1,2 문단은 못해도 10번은 소리 내어 읽는 듯하다. 이 행위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다. 왜냐하면 고심한 만큼 나 스스로는 만족할만한 완성물이 나오니까.

하지만 이번 주제를 생각해 보자. 그간의 힘든 일들을 '배경-사건 1-사건 2-감정 1-감정 2-결과 1-결과 2-사건 3...'처럼 정리해서 계속 되뇌어볼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이 피로해진다. 따라서 이번 글은 내 기준 <글쓰기 모임 최초>로 복기 없이 써 내려가는 중이다. 그러니 문단 간의 개연성 파괴, 오늘만큼은 흐린 눈으로 봐주시길 바란다.

직장을 다니며 눈이 취약해진 것도 싫다. 렌즈를 분명 잘 세척했는데도 하루만 껴도 눈이 금방 충혈된다. 으으. 나는 안경 쓴 내 모습도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 선택권이 나한테 있지 않다는 건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리고 마스크 쓴 채로 안경까지 쓰면 힘들다! (여담이지만, 마스크를 썼을 때 눈밑으로 올라가는 입바람이 눈을 건조하게 만들어 안 좋다고 한다. 그러니 마스크-렌즈 조합도 눈에 해로운 현실..)

걱정되는 마음에 안과에 가보니, 결막/각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피로할 때 실핏줄이 많이 생긴다고 설명해 주셨다. 확인사살받은 마음으로 처방받은 '각막보호성분 들어간 인공눈물'을 열심히 수혈 중이다. 힘든 걸 알아줬으면 하는 응석 어린 기대는 버린 지 오래이니, 부디 내 몸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겨운 주중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공공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누볐다. 눈의 피로 부담을 줄이고자 최대한 멀리 보고, 푸른 이파리들도 많이 봤다. 그렇게 자전거 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니 어느덧 바닥에는 낙엽이 즐비했다. 엥 벌써? 위를 보니 여전히 나무는 초록색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지난해 낙엽들이 미처 덜 치워졌나 보다. '될 대로 되어라' 싶은 그 공간이 꽤나 멋져 보였다.

운동 수업 가기 전,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나는 커피를 잘 못 마신다. 맛과 향은 좋아하는데, 한잔을 온전히 마시면 심장이 매우 두근댄다. 하지만 보통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가 제일 싸고, 직장에 들어가니 다들 아메리카노로 통일하는 추세여서 그냥 반 정도 마시거나 다 마시고 잠 못 이루곤 한다. 조금 더 친한 사이면, '연하게' 혹은 '반샷' 요청을 드리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은 치킨과 논알코올 맥주 소캔을 마셨다. 하이네켄도 논알코올이 나왔길래 신기해서 사봤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논알코올과 무알콜은 다르다. 무알콜이 완전히 0%라면 논알코올은 0.03% 이하로, 김치 등 발효식품에 있는 알코올보다도 낮은 수치라고 한다. 술 마시면 다음날 속 쓰림이 심해 자제하려 한다. 맥주의 청량감은 좋아하는데, 오늘 마셔본 결과 선택권이 있을 때라면 종종 무알콜을 마실 예정이다. (단, 기네스와 코젤은 제외!)

디카페인으로 시작해 논알코올로 끝나는 하루라니. 공갈빵처럼 '있는 척' 좀 해본 날인 걸까?  두 가지 모두 어른들이 지칠 때면 찾는 '아이템'적 요소가 있다. 나도 어른이 되긴 했나 보다. 두 아이템(근데 이제 '디'와 '논'을 곁들인)의 효과는 어마무시했다!
 
속으로 '행복하지 않아'를 중얼거린 한 주였는데, 밀린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을 마치고 글까지 마무리하게 되니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우리 모두, 오늘 하루도 참 잘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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