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가장 배신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딱복(딱딱한 복숭아)’인 줄 알고 산 복숭아의 정체가 ‘물복(물렁한 복숭아)’으로 드러났을 때다. 아삭아삭한 속살을 기대하며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앞니가 ‘물컹~’하고 박힐 때의 기분이란… 정말이지 배신감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동네 시장을 구경하는데 과일가게 앞 빨간 대야에 담긴 복숭아가 눈에 띄었다. 적당히 핑크빛이 돌고 단단해 보이는 껍질이 영락없는 딱복의 그것이 아닌가. 이미 입추가 지나 처서를 앞둔 시기, 저 녀석들이 높은 확률로 올해 마지막 딱복이겠다는 위기감 섞인 확신이 들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사장님께 어서 이 딱복을 내게 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사장님은 빠른 손놀림으로 복숭아 5알을 검은 봉지에 옮겨 담았다. 여러 차례 배신의 경험을 한 나는 마지막 확인 사살도 잊지 않았다. “사장님, 이거 딱딱한 거죠?” “딱딱하죠, 아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흐르는 물에 복숭아를 문질러 씻으면서 사장님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때 이미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이 복숭아가 실은 (내 기준에서) 물복이라는 것을. ‘아직은’이라는 사장님의 끝말에서 단서를 얻었어야 했는데… 여름의 끝자락에 결국 또 당하고 말았다.
이 배신의 드라마에서 나의 죄를 찾는다면, 그저 양심적이었던 것 뿐이다. 대개 마트에서는 진열대 앞에 ‘딱딱이’ ‘물렁이’라는 팻말을 적어둔다. ‘누르지 마세요’ ‘아파요’처럼 복숭아 감정에 이입한 듯한 문구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복숭아의 경도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찔러보고는 사가지 않는 손님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손님이 아니다. 더구나 전염병이 도는 시국 아닌가. 찔러봤으면 딱복이든 물복이든 사야 한다.
곤란할 때는 알려주는 팻말이 없는 경우다. 내 눈을 믿거나 점원에게 물어보는 방법뿐인데, 내성적인 성격 탓에 가급적 물어보지 않고 해결하려다 여러 번 낭패를 본 뒤로는 열심히 묻는다.
문제는 딱복과 물복을 가르는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이거 딱딱해요?”라고 물어보면 “딱딱해요.” “아삭해요.”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얼마만큼 단단해야 딱복이라 할 수 있는지는 먹는 사람의 취향에 달려있다. 오늘 과일가게 사장님이 말미에 작게 덧붙인 ‘아직은’도, 딱복에서 물복으로의 후숙 과정에 있는 복숭아가 본인 기준에서는 딱딱하나 당신에겐 아닐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게 아닐까. (국내에서 재배하는 복숭아의 품종은 100개가 넘고, 시간이 지나도 잘 물렁물렁해지지 않는 복숭아도 있다고 한다.)
딱복과 물복은 온라인 세상에서 곧잘 벌어지는 ‘vs 논쟁’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디저트계에 ‘민초단’과 ‘반민초’, 중식계에 ‘찍먹파’와 ‘부먹파’가 있다면 과일계에서는 ‘딱복파’와 ‘물복파’로 갈라져 대결이 벌어진다. 특히 여름철 SNS에서는 두 계파 사이에 조롱이 오가는데, 최근에는 이 공격을 받고 깔깔 웃었다. “딱복 그거 완전 무 아니냐. 소고기 딱복국이나 끓여 먹어라.”
사실 이런 vs 논쟁에 심드렁한 편이어서, 찍먹인지 부먹인지 묻는 질문에 “아무렇게나 먹으면 되지 뭐 어떠냐”고 반응하곤 했다. 그러던 내가 당사자가 되어보니 왜 그동안 사람들이 그리도 뜨겁게 싸웠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두 파가 팽팽하게 맞설 만큼 선호도가 나뉜다는 것이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압도적인 딱복파다.
이제는 이 싸움이 더 이상 의미 없을 만큼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복숭아는 물론이고 여름 과일들이 슬슬 진열대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이 떠나는 것은 반갑지만 과일 만큼은 아쉽다. 어느 푸드 칼럼니스트가 “‘딱복’ ‘물복’ 싸울 시간에 하나 더 먹자”고 쓴 글을 봤는데 그 말이 정답이다. 딱복이냐 물복이냐 싸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먹는 게 이 늦여름 남는 일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