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본 빵집 수백 군데 중 가장 맛있는 곳을 꼽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이라면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다. 3년 전 출장지인 요르단에서 만난 한 빵집이 그 주인공이다. 컨테이너로 얼기설기 지은 건물에 인테리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가게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난민 캠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시리아 난민 아동을 취재하기 위해 아즈락 난민 캠프를 찾았다. 수도 암만 외곽에 위치한 이 캠프에는 난민 약 5만4000명(2018년 기준)이 살고 있었다. 오랜 내전으로 고향이 폐허가 되자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었다. 작은 도시 하나를 이룰 만한 인구 규모였지만, 난민 캠프는 이들이 뿌리 내리기엔 척박하기 그지 없었다. 나무 한 그루 보기 어려운 사막 위에 지어진 데다 총을 든 군인들이 곳곳에서 사람과 물건의 출입을 제한했다.
빵집은 그런 난민 캠프 한 가운데 있었다. 캠프 안에는 시장이 여러 군데 형성돼 있었는데 현지 구호단체 직원 오다이가 마침 볼일이 있다기에 잽싸게 따라나섰다. 수십 개 노점이 늘어선 시장은 보통의 시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과일과 채소, 염소젖, 휴지 등을 파는 슈퍼마켓부터 케밥 가게, 옷 가게, 자전거포 등 다양한 상점을 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파는 가게도 보였다. (난민도 스마트폰을 쓴다. 일자리를 구하거나 고향에 남겨진 가족과 연락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당시 난민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두고 제기된 ‘가짜 난민’ 의혹은 한국 사회가 난민을 얼마나 얄팍하게 이해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빵순이의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역시 빵집이었다. 너댓 평쯤 될까 싶은 작은 가게 안에서는 커다락 화덕이 자리를 차지하고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2디나르(약 3000원)을 내고 피자 3개를 주문했다. 손바닥만 한 반죽에 잘게 썬 양파와 소시지 등을 얹은 피자가 즉석에서 구워져 나왔다. 토마토 소스가 적어 주로 밀가루 맛이 났다.
밍숭한 맛의 피자를 뒤로 하고 가게를 나서던 그때, 쇼케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절인 체리를 올린 초코케이크, 생크림 케이크 예닐곱 개가 진열돼 있었다. 난민 캠프에 케이크라니. 눈이 휘둥그래진 내게 오다이가 말했다. “난민 캠프에서도 누군가는 생일을 맞으니까요.”
무릎을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전쟁이 터져도, 집을 잃고 사막 위에 살아도 일상은 부지런히 구르며 또 굴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도 때가 되면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한다. 어른들은 일터에서 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이들은 하루 다섯 번 성전을 향한 기도도 잊지 않는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난민 캠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캠프가 세상의 전부인 아이들이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생일이면 케이크를 먹고,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거나 축구를 하는 일상이 결국 아이들의 유년의 기억이 될 것이다.
얼마 전에는 탈레반이 점령한 카불을 탈출한 아프가니스탄인 300여명이 한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구상에 시리아와 예멘 말고도 또 하나의 생지옥의 생겼다고 생각하니 착잡한 기분이다. 그 누구든, 어디에 있든 안전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