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디 Jul 30. 2022

요즘 남편으로부터 예쁘다는 칭찬이 뜸하다

요즘 남편으로부터 예쁘다는 칭찬이 뜸하다.


남편은 본인이 내킬 때 진심 어린 칭찬을 하는 타입이라 입에 바른 말은 거의 아예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한없이 예쁨을 받고 싶은 전형적인 여자라서 예쁘다는 소리를 주기적으로 듣지 못하면 정말로 표정이 굳고 얼굴 색이 칙칙해진다. 정신의 결핍이 육체로 드러나는 것 같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다크서클에서 파생된 눈가의 어둠은 언제나 그랬듯이 얼굴 전체에 짙은 그림자로 퍼지며 그 존재를 입증하고 있으며, 입꼬리는 우울하게시리 내려가 있다. 눈은 어째 갈수록 더 작아지는 것 같은데, 이는 기분 탓이 아니라 사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어느덧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생기가 없다. 여기저기 여드름이 났던 자국 때문에 얼굴이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파운데이션을 적당히 피부 위에 두드린다. 톡톡톡. 피부가 좀 더 환해지고 여드름 자국이 희미해졌다. 이제 자세히 보지 않는 한 내 얼굴에 묻은 지저분한 먼지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의 색으로 피부를 칠한터라 왠지 눈코입이 사라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영혼이 없달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았다.


그랬더니 저절로 눈가의 주름이 자글해지면서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되었다. 양 볼의 근육도 쑤욱하고 올라갔다. 입술만 움직였는데 얼굴 전체가 반응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그 전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나는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예뻐, 진짜 예뻐!"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나에게 먼저, 조건없이 예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어제 새로 산 옷을 입거나, 선물 받은 화장품을 처음으로 내 얼굴에 얹어보거나, 머리가 유난히 잘됐거나 하는 그러니까 정말 예쁘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만 내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결코 오늘처럼 비루하고 초라한 내 얼굴에 대고 먼저 칭찬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런 기준과 조건이 없이는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행동, 즉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배워야 하는 것일까. 부모가 처음부터 학습 해주어야 하는걸까, 아니면 '어른되면 알아서' 깨달을 범주에 있는 항목 중 하나인 걸까.


어찌됐든 예상 외로 나를 내가 예뻐 한 결과는 너무나도 긍정적이었다. 피부 화장을 마치고 눈썹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칠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하는 일련의 과정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반복된 소리로 말했다. 너무 예쁘다 너무 예쁘다. 그렇게 입으로 중얼거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니 그 순간에는 정말 내가 예쁘게만 느껴졌다. 처음에는 선의의 거짓이 섞여있던 말이 아니었지만 말미에는 사실의 말이 되었다. 나는 충분히 예뻤다. 굳이 누구에게서 예쁘다는 소리를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진심으로 나를 아끼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이 '평온한 마음'을 왜 그렇게 갈구하는지 알게 되었다. 결국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삶을 잘 산다는 것, 성공한 인생을 산다는 것 그런 것들 모두는 결국에는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이룰 수 있는 다음 단계였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주의라던가, 휴머니즘과는 그 개념과 결이 상이하게 다르다.


이로써 선행 과제를 다져 놓지 못한 채 그 다음 단계의 삶을 바랬던 나의 어리석음을 우연한 계기로 목도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지금의 내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좋은 결의 '나의 삶'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은 결의 내 삶은 그 반대 성질의 것들도 포근히 감싸 안아줄 것이다. 내 인생은 그렇게 단순화되고 밝은 빛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이것만이 오직 내 삶의 계획이다.






오늘 제주에는 태풍이 찾아왔다. 그렇게도 틀리던 일기예보가 드디어 맞았다.

자유롭게 부는 바람 때문에 바다는 뒤집히고 야자수 나무는 이파리가 꺾이고 우산은 뒤집혔다. 내 개 두마리는 눈도 잘 뜨지 못한다. 빗방울을 머금은 바람이 자꾸 내 개들의 동공을 때리기 때문이다. 개들의 꼬리는 폭삭 내려갔다. 무서움을 느끼나 보다.


내 안에도 가끔 아무 이유 없는 태풍이 불어 다 뒤집혔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눈을 뜰 수도 없이 강한 바람이 내 속에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을 모두 다 쓸어가 버리면 왠지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깨끗할 것만 같았다. 쓰레기 없는 잔잔한 물결만이 일렁이며 내 마음이 드디어 고요해지지 않을까하는, 그림을 그려 보았다.


 나는 보통 내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사는데, 문득 좋은 사람이란 어떠한 환경적 변화에도 그 '좋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예를 들어 찢어지게 가난하고, 사람 때문에 상처를 지겹도록 받아도 집에서 아빠를 혹은 엄마를 기다리는 내 새끼들에게 만큼은 어제보다 더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고, 그 목소리는 더욱 차분하고 고요한 소리를 내며, 행동거지는 더욱 신중하게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결국 나는 '아직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기분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지는 않는다(혹은 노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난 매일 거울 속 초라한 내 얼굴을 보며 예쁘다고 말해줄 것이다. 왠지 느낌에 이것이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첫 걸음인 것 같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손을 잡고 자던 당신, 나의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