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디 Jul 31. 2022

비를 맞으며 내달리던 라오스 그 거리

올해도 제주도에 어김없이 태풍이 찾아왔다.

바람이 세게 불고 비는 하얗게 내린다. 


나의 강아지 두 마리는 실외배변만 고집한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오는 이런 날에도 외출을 해야 한다.


거의 10년 째 입고 있는 우비를 챙겼다. 투박한 장화를 신고 우산을 챙기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짐만 될 뿐이라는 걸 나는 안다.


매일 산책하는 넓은 잔디 밭 공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공터 바로 옆에 계곡이 있다. 계곡은 아마 이런 태풍이 온 날에는 접근금지일 것이다.

우리는 물가는 가지 않는다. 강아지 둘 다 물을 너무 싫어하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니 비 맞는 것도 달갑지 않은 눈치다. 하지만 오줌은 마렵다.




애들이 비를 맞으며 똥을 싼다. 한 녀석은 어제는 싸지 않아 오늘 두 번 쌌다. 

중형견 똥은 왠만한 사람 똥과 비슷하다. 하필 이런 날 배변봉투를 넉넉하게 챙기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바지 주머니에 많았는데..'


억지로 봉지 하나로 3회 분량의 똥을 치우고 나니 비가 더 퍼붓기 시작했다. 

빗물이 자꾸만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순간, 8년 전 내 속옷까지 적셨던, 라오스의 스콜성 소나기가 떠오른다.


 



그때, 스콜성 소나기가 미친 듯이 루앙프라방을 적셨던 그날, 나는 여행사에 가는 길이었다.

시간은 어스름 저녁이었다. 대략 7시쯤?


방비엥으로 가는 여행버스 티켓을 사야 했던 나는 여행사가 필요했고, 길에 나선 그 순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총천연색의 면을 바닥에 깔고 이것 저것을 팔고 있던 현지 상인들은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재빨리 면을 거두었다. 손이 얼마나 빨랐던지, 온통 노란빛으로 찬란했던 그 저녁의 거리는 어느새 해도 없는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물론 상점의 불빛이 거리를 비춰주어 나는 여행사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되었다. 


가방에는 우비가 있었다. 우산은 왠지 번거롭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 그냥 우비만 챙긴 터였다. 나도 현지 상인들이 면사포를 거둘 그때, 가방에서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우비를 꺼내 입었다. 유난을 떨지 않는게 핵심이다. 


비는 갈수록 더 세게 내리고 있었고, 앞은 점점 뿌옇게 변해 갔다. 그때의 빗줄기가 마치 꼭 지금의 빗줄기와 꼭 같은 모습이다. 빗방울의 온도도 같고, 대기의 습도도 같다. 그저 시간과 장소만 바뀐 것 뿐이다.


한 아시안 여성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옷가지가 젖지 않으려 호다닥 뛰어갔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외마디를 하면서. 그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빨리 뛰면 빗줄기에 젖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것이 비를 피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는 걸까?


여자가 저 멀리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빗물이 내 얼굴을 타고 스르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내 안에 어떤 것이 갑자기 '틱'하고 풀리는 것을 느꼈고, 이윽고 나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여행사가 어디쯤 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앞으로 내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때 20대 중반이었고, 자유를 느끼려 혼자 동남아 여행에 온 터였다. 그리고 자유를 느끼려면 평소에 내가 하지 앉던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미 다 젖어버린 우비의 모자를 젖혔다. 내 머리카락은 이미 수북히 젖어 내 옆 얼굴을 감싸 쥔 채 떨어질 줄을 몰랐고, 나는 젖어서 무거워진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두 다리가 속도를 내면 낼 수록 내 얼굴에 피어 오른 미소는 꺼질 줄을 몰랐고, 오히려 몸이 젖으면 젖을수록 깔깔깔하고 웃고만 싶은 충동이 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허공을 향해, 나의 웃음을 받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웃어 제끼며 막 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그때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미친년이라고 했겠지만, 그것은 내 알바가 아니다.




그때 그 여행에서 난 비를 맞으며 미친년처럼 루앙프라방거리를 뛰었던 그날 저녁이 가장 선명하게 마음에 남아있다. 너무나도 자유로웠고, 행복했고, 완전했다.


그리고 그때의 빗방울이 나를 다시 찾은 듯한 지금, 이제는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지금,

내 발 언저리에는 강아지가 빗물에 눈도 잘 뜨지 못한 채 뛰어다니고 있다. 그래서 한 번 다시 해봤다. 추억 속에 묻혀 있던 그때의 나를 갑자기, 아무 약속도 없이, 끄집어 내어 이 빗 속을 같이 뛰자고 말해보았다.


나는 빈 잔디 공터를 마구 달렸다. 장화를 신어서 발은 무거웠고, 이미 속옷까지 젖었다. 그리고 8년 전 입으나 마나했던 우비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만 원짜리 우비는 효용성이 없는 것이다.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자유롭지가 않다. 얼굴에 미소도 피어오르지 않는다. 용기 있게 내달렸지만 나는 그저 물에 젖은 생쥐 일 뿐이었다. 갑자기 젖은 속옷이 너무나 차갑게만 느껴졌고, 젖은 우비가 찝찝했다. 





같은 우비와 닮아 있는 빗방울이었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상반됐다. 괜시리 힘이 빠지고 심통이 났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항상 나를 보며 웃어주는 강아지들뿐이라 나는 이 참에 엉엉 울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젖어버린 얼굴에 빗물과 눈물이 섞이기에는 그 온도 차가 너무나 클 것 같아 무서웠다. 차가운 것은 빗물이 아니고 내 눈물일 것 같았다. 그래서 울지도 못했다. 나이가 들면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많은 법이다.


이미 다 젖어버렸지만 그래도 습한 기를 없앤다고 차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었다. 추웠다. 젖은 옷 때문에 피부의 표면이 차갑게 식어갔고 나는 그 냉랭함에 좌절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남편으로부터 예쁘다는 칭찬이 뜸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