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졌다고 어른이 되기를 중단합니까? | 메이저아르카나 16번 타워 카드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서래 역)로 인해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게 된 박해일이 한숨처럼 내뱉는 대사다.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뜻을 지닌 '붕괴'는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붕괴되었다고 고백하는 박해일에게 탕웨이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다.
붕괴된다는 건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너진 탑을 다시 세운들 그건 무너지기 이전의 탑이 아닌 새로운 탑이다. 붕괴됨은 그래서 잔혹하다. 붕괴 이전의 모든 것들을 무력화한다. 붕괴된 대상이 건물이든 계획이든 신념이든 사랑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세워진 의도와 배경은 물론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과 그것들을 중심으로 이어질 미래까지 모조리 붕괴로 이리저리 엉키거나 상실되고야 만다. 영화 속 중심 사건 때문에 서래를 향한 해준의 감정, 형사의 직업의식, 삶의 이념 같은 내면세계가 붕괴되었다. 살아온 맥락이 갈피를 완전히 잃었다. 그래서 해준은 붕괴된 잔해를 뒤로 하고 이포로 떠난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타로카드와 뇌가 동기화된 나는 곧장 타워 카드를 떠올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사람과 와르르 무너지는 탑. 타워 카드에 묘사된 상황처럼 영화 속에는 높은 곳에 떨어져 죽은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주인공 박해일(해준 역) 스스로가 하나의 탑인 양 완전히 붕괴되는 표현까지 타워 카드 그 자체 같다고 생각했다.
이 카드를 뽑은 이들은 다들 헉, 하고 숨을 멈춘다. 카드 그림 자체도 아주 위협적이다. 그림만 봐도 점괘가 예상이 간다. 망했고, 무너졌고, 곧 끝날 것만 같다. 탑 꼭대기에 내리친 번개로 인해 탑 상단 왕관 모양 구조물은 부서지고, 탑의 창문마다 불길이 치솟고, 두 인물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흑색 배경 위로 회색 구름들은 위기감을 조성한다. 일전에 소개한 심장을 찌르는 칼 카드는 10개의 칼보다는 덜한 상황이라고 위로할 수야 있지, 이번에는 영락없이 부정적인 상황이다. 타워 카드는 부연 설명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와르르 무너져버린 상황을 뜻한다. 갑자기 연인과 사이가 안 좋아지고,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고, 갑자기 해놓았던 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붕괴됨은 해준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나는 연인과 그의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붕괴를 경험했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파는 1만 5천 원 상당의 커피 세 잔을 한 입 마셔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내리꽂은 것이다. 카페에서 준 종이 캐리어 이음새가 잘 맞물려 있지 않은 탓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북 찢어졌다. 세 잔의 커피가 보도블록 위로 처박혔다.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한 2분 정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만나기로 한 이에게 상황을 전할 사진을 찍고 전송했다. 길을 지나던 중년 남성이 대뜸 나를 고래고래 큰 소리로 혼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대처했냐면, 스물아홉 살이나 먹었으면서 이런 일에 속절없이 엉엉 울고야 말았다.
어른답지 못하게 핑계를 대자면, 그날은 진짜 최악이었다. 몸이 정말 안 좋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자존감이 이미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깟' 커피가 아니라 커피'까지' 나를 조롱하는 기분이 들었다. 99까지 쌓여있던 붕괴 위험이 마침내 와르르 쏟아진 커피로 기어코 100이 되어버린 것이다. 점입가경으로 도합 105%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신론자이면서도 신이 완전히 나를 버렸구나 또 한 번 없는 신을 붙잡고 좌절했다. 엄마... tlqkf... 같이 나와서는 안될 단어들이 자꾸 입 밖으로 쏟아졌다.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나는 우아아아아앙 소리 내며 울었다.
헤어질 결심 주인공처럼 대단한 일(?)로 고상하게 "나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고 말하기란 불가능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특히 취약하다. 사소한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을 더 크게 낭비한다. 큰일이 어쩌다 그르쳤을 때는 오히려 배포 크게 그럴 수도 있지! 하는데 쬐그마한 것을 못하는 나를 견딜 수 없다. 종이 캐리어가 찢어질 수 있음에 주의하지 않고 걸어간 나 자신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깟 커피야 뭐, 다시 사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길에 주저앉아서 울었다.
하지만 세상은 붕괴된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만오천 원 상당의 커피를 쏟은 나는 준법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바닥에 흩뿌려진 커피 잔해를 치웠다. 플라스틱과 종이컵을 분리수거하느라 손에 묻은 커피가 끈적여서 눈물도 닦을 수가 없었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재난현장에서 조금 비껴 나서 옆 옆 건물 필로티 아래에 주저앉아서 또 울었다. 당이 떨어져서 가지고 다니던 사탕을 입에 물고 질질 짜면서 집으로 향했다. 세수하고 밥을 먹고 나니 커피 쏟은 일쯤은 그냥 또 하나의 글감이 되었다. 100이라는 수치의 탑을 쌓던 스트레스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내가 예로 끌어온 커피를 쏟은 상황은 그래서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플라스틱 컵을 줍고 다 쏟아진 커피를 하수구 쓸어내면 그만이다.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망친 것을 들여다보며 최선을 다해 수습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이 겪은 상황은 어떨까? 붕괴된 시간을 부산에 두고 서래가 없는 이포로 근무지를 옮긴 해준은 서서히 말라간다. 해준의 아내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가 생기를 잃었다고 했지만 나는 붕괴된 것을 바로 세우지 않고 도망친 자의 말로라고 생각했다. '무너짐'을 경험한 사람이 가장 먼저 해버리는 건 외면 또는 봉인이다. 무너진 것을 뒤로하고 무너지지 않은 것처럼 진실을 제 속에서 은폐해버리고 다른 삶(해준의 경우에는 살인사건이 될 수 있겠다)을 그 위에 쌓는 것. 그리하여 붕괴를 망각의 영역으로 사라져 버리게 두는 것 말이다. 그럼 그건 정말 없던 일이 될까?
내 대답은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이다. 이포의 어물전에서 서래를 마주치자마자 해준은 꼼짝없이 붕괴된 상황으로 다시 소환된다. "이럴려구 이포에 왔습니까?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해준은 서래를 향해 발악해보지만 아무래도 소용없다. 부산에서 있었던 거대한 붕괴의 잔해를 이끌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사연까지 품은 채로 서래가 눈앞에 등장했기 때문에. 서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건은 없던 일로 봉인해도 서래에 대한 감정은 폭우에 줄줄이 터지는 둑처럼 막을 길이 없어 해준은 그저 눈에 핏발을 세울 뿐이다. 잔잔한 강물 아래 회오리치는 물살처럼 이제 더 바로잡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사건과 감정이 해준의 속을 휘몰아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준과 서래의 감정선에 주목할 때 나는 해준이 말한 '붕괴'와 그 붕괴가 해준을 어디로 이끄는지 지켜보았다. 영화 자체를 평론가들처럼 20자 평 해보자면 '붕괴를 수습하지 않은 도망자의 어설픈 결말' 정도로 써볼 수 있겠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원하지 않는 이별을 겪거나,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한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거나, 심심해서 재미로 쌓던 도미노가 한순간에 무너지거나... 한 사람의 생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일은 언제나 거대하다. 내년 이맘때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하든,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객관적으로 크고 무겁든 '무너짐'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언제나 남의 것은 작고 내가 겪은 것만 크게 느껴진다. 타인의 붕괴를 쉽게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주 이 사실을 잊고 경솔하게 발언한다. 타인의 괴로움을 격하시키고, 마치 그 붕괴를 잘 넘긴-사실 그렇게 잘 넘기지도 않았다 대부분 회피한- 자신을 우상화한다.
반 세기 넘게 산 아빠는 항상 내가 겪은 붕괴를 '그깟 일'로 묘사했다. 친구 관계가 잘 풀리지 않거나 직장 스트레스로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던 나에게 아빠는 꼭 "네가 그릇이 작아서 그런 일로 맘 졸이는 기다"라고 말했다. 내가 어떤 상황이든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얘기는 뻔하다. 아빠는 더 힘든 삶을 살아왔고, 세상천지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널렸다고. "그걸 내가 모르겠냐"라고 빽 소리 지르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혼났다. 그깟 일로 무너지는 사람으로 나를 낳아놓고서는 왜 나를 더 몰아세워? 별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아빠를 탓할 정도로 나는 삐뚤어졌다.
30년 가까이 아빠를 지켜본 바, 나는 그것이 아빠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았다. 방어기제라고 고급스럽게 표현했지만 여태껏 했던 말로 풀어 설명하면 붕괴에 대처하는 자세라고 할까? 아빠의 인생 얘기는 대체로 기구했고, 그 기구함을 표현할 곳이 없었고, 아빠 속에서 최대한 그 일이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해버리는 것만이 대처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방식은 붕괴된 타인의 세계마저 축소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나도 버텼는데 왜 쟤는 못 버텨? 쟤는 나보다 나쁜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로 그 '쟤'는 아빠보다 학벌도 좋고, 비싼 밥도 많이 먹고, 친구도 많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나'였던 거다.
언젠가 별 기대 없이 아빠에게 이 얘기를 풀어 설명했을 때, 아빠는 "그렇네. 그런 것 같다."라고 긍정했다. 모든 말을 '아니'라고 시작하는 습관성 부정 발언자인 아빠에게 아주 대단한 호응이었다. 그 뒤로 아빠는 나의 무너짐을 멋대로 축소하는 말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다. 국어책 읽는 사람처럼 "힘들었겠네. 아빠는 네가 말해줘서 이제 알았다."라고 꽤나 인정하는 자세로 돌아섰다. (이렇게 되기까지 10년의 노력이 있었는데, 그건 너무 긴 대하드라마라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내가 풀어 설명한 방어기제 어쩌고 얘기가 아빠에게는 그간의 붕괴를 직면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아빠는 그 뒤로 "유빈이 네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이건 이랬던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하더라.
이 글을 쓰는 나도 아빠처럼 반 세기 넘게 고집대로 살면 비슷해지지 않을까? 본능적으로 '뭘 저 정도 일로 그래?'라고 공감하지 못하고 무신경한 태도가 불쑥 솟을 때가 있다. 그 일의 당사자에게도 좋지 않은 생각이지만 후일에 비슷한 상황에 처할지 모르는 내게 '이 정도 일로 괴로운 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제발 그만 좌절해!'라고 다그치기 딱 좋은 사고방식이다. 붕괴를 마주할 때마다 피해규모가 얼마나 되든 우리는 그 일을 수습하고 살아가야 하는데,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묻어두고 발각되지 않으려 발악하는 방법만 열심히 학습하게 된다.
이쯤 되면 내가 회피를 너무 죄악으로 여기나 싶다. 물론 '회피하는 게 어때서? 수습하기 싫으면 좀 도망칠 수도 있지!' 생각할 때도 있다. 인기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逃げるは恥だが役に立つ>의 제목처럼 도망은 가끔, 아주 가끔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도망 이후엔 언제나 변하지 않는 진실을 맞닥뜨린다. 직면하고 수습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해준은 붕괴된 과거를 붙들고 서래가 사라진 모래사장을 하염없이 헤맬 것이다. 붕괴된 것도 괴로운데, 바로잡지 않으면 영원히 머물러야 하다니. 무너짐은 이토록 가혹하고 집요하게 우리를 몰아세운다. 회피하고 영원히 고통받을래? 고통스럽게 직면하고 지나갈래? 선택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놓고 말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회피해버린 것을 잘 넘긴 거라고 위안하는 쪽은 싫다. 직면하고 질질 짜고 엉성하더라도 내 분수에 맞게 수습하면서 살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외면, 봉인, 세뇌, 발악, 분노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모두 붕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너무 힘들면 그냥 누가 내 머리에 총을 쏘거나 뇌를 해부해서 그 부분만 도려내든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포로 도망친 해준의 마음도, 더 불행한 사람의 상황과 비교하며 내 상황을 상대적으로 좋아 보이게 만드는 아빠의 방식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자주 눈을 질끈 감고 도망치고 싶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맨날 운다. 꼴사나운 걸 알면서도 울지 않기를 다짐하지 않는다. 내 세상이 다 조져졌을 때 눈물까지 아낄 자신이 없다. 울고 싶을 때 아낀 눈물은 언젠가 또 다른 붕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평소에 틈틈이 울어둬야 한다고 합리화한다. 눈물 쥐어짜면서 할 건 다하니까 이 정도는 봐주면 안 될까요... 하는 마음으로 세상사를 촉촉한 눈으로 마주한다. 얼마나 질질 짜야 이 모든 붕괴에 통달할지는 알 수 없어 한숨만 나오지만 언젠가는 나도 의연해질 때가 오겠지. 물론 반 세기 이상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타로 상담을 받으러 온 이들에게까지 무턱대고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를 시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누구도 앞날이 나쁘기를 기대하지 않고, 타워 카드처럼 요란한 와르르 맨션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다 잘될 거고, 걱정할 게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타로를 볼 테니까. 나는 타워 카드와 그 사람의 불안 사이에서 말을 고른다. "운세 결과가 와르르 맨션이긴 한데요..." 이 뒤가 중요하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이 부정적인 일만을 의미할까? 공 들인 탑이 언제나 가치 있는 건 아니다. 자칫 잘못 쌓은 벽돌을 두고, 지금까지 쌓은 탑이 아까워 계속 쌓아나간다면 완성된 탑은 조그만 외부 자극에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내 뜻이 아닌 일들을 지지부진 이어나갈 때가 있다. 끝내야 하지만, 끝내지 못하는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오랜 시간 해온 게 아까워 포기하지 못하거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연인을 놓지 못하고 즐겁지도 않은 연애를 이어나가거나, 상사의 폭언이나 동료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쉬이 퇴사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 예이다. 그 상황 밖 제3의 외부인은 우리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안다. 하지만 탑 속에 갇힌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할 벼락은 쳐야만 한다. 냅다 탑에서 쫓겨난 우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온몸이 긁히고 부서진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회복할 것이다. 흐르는 피를 닦고 약을 바르고, 깁스하고, 조금 불편한 시간을 겪겠지만 살아있는 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을 것이다. 그럼 이제 무너지지 않는 탑을 쌓으면 된다.
애써 무너질 탑이었다고 위안하려 해도 '이건 절대 무너져선 안돼요.' 간절하게 내 손을 붙들고 애걸하는 분들도 있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겪는 배신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삶은 늘 다정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삶이 언제고 안정되고 평온하지 않다는 걸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나는 주로 스케이트 타다 넘어지면서 깨달았다) 기어코 직면해야만 한다. 붕괴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빠르게 회복하고 같은 방법으로 붕괴되지 않을 수 있을지 예방하는 것이 삶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나는 그저 카드를 뽑은 이가 무너진 탑 앞에서 오래오래 울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