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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빈 Sep 25. 2022

좋은 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둘만의 탑을 쌓아가는 과정 | 메이저 아르카나 6번 연인 카드


도파민 중독인 나는 요즘 커뮤니티에서 부쩍 연애 이야기가 줄었다고 느낀다. 미디어에서 연애 중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 이도 줄어든 것 같다. 연애 말고도 세상에 재밌는 얘기가 아주 많으니까 연애 얘기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 좀 한 번 해보자는 말들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연애 이야기가 좋다. 실례가 될까 봐 먼저 대화 주제로 꺼내지 않지만 상대 쪽에서 먼저 연인이 있음을 내비치면 놓치지 않고 꽉 물어 챈다. 친구들의 연애 얘기도 좋아하는 편이다.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다! 고 먼저 포문을 열어주길 기대한다. 그러면 내가 헨델과 그레텔처럼 다음 이야기의 빵조각을 던져준다. 친구는 그 빵조각을 하나하나 주워가며 연인과 어떻게 만났는지, 그 사람과 어떤 지점이 통하는가 느꼈는지 나에게 설명해주기만 하면 된다.


상대가 기혼자라면 대화가 더 편해진다. 나는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상대의 어떤 점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는지 꼭 물어본다. 요즘에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세상이기 때문에 답변은 모두 다채롭다. 단 하나의 맥락은 '이 사람과 살면 계속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함께 있으면 재밌어서 인생의 아주 오랜 여정을 함께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요즘 인기 있는 연애 프로그램에도 과몰입할 것 같지만 그런 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연애 프로그램에서 등장하는 연애는 늘 '굳이'라는 부사와 함께 등장해서 몰입을 해친다. 굳이 왜 저기에서? 굳이 왜 저 사람을? 굳이? 연애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서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부분만 나에게 노출했으면 좋겠다. 제작진의 의도가 개입되었다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듣고 싶지 않은 구구절절한 속사정까지 오픈하는 건 내 쪽에서 바라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그 사람과 헤어질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떨까? 이런 류의 연애 고민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정도 정리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래서 자기 정리된 사람이랑 얘기하는 게 좋아"

함께 커피를 마시던 회사 동기 언니가 말했다. 이런저런 내 근황을 얘기하고, 앞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해볼 작정이라고 말하자 따라온 대답이었다. 자기 정리, 라는 말에 대해 설명까지 부연하지 않아도 나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이해했다.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 '앞으로 나는 뭘 해야 좋을까?', '그 사람과 나는 잘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상대가 바라는 그 '무엇'에 집중했지만 생각해보니 그 모든 건 본인에게 답이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고 행동하는 사람(=자기 정리가 잘 된 사람들)은 언제나 혼란스럽지 않고 명쾌하다. 질문을 바깥으로 던져 문제화하는 건 좋지만 영원히 그 정답을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연애와 자기 정리는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다. 나는 제발 자기 정리된 사람들이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 연애하면서 자신을 찾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연애하면서 몰랐던 취향을 깨닫게 되거나 타인의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넓히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취약하고 어떤 트라우마를 평생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남들이 생각하는 내 장단점은 무엇인지, 내 몸상태는 어떠한지, 내 주변을 어떤 방식으로 정돈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연인을 사귀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지만 이 사안만큼은 이렇게 강경하게 말하는 이유는 이건 과거의 나에게 내지르는 꾸짖음이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쉴 새 없이 연애하는 사람으로 꼽혔다.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가도 잠시 한눈팔다 다시 나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이도, 헤프다고 눈을 흘기는 이도 있었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누군가와 긴밀하게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갑자기 수많은 선택지를 제치고 서로를 우선 예약해버리는 일을 많은 사람이 용인해준다. 연인이라는 자격은 그만큼이나 로맨틱하고 위험하다. 너무 많은 것을 가능한 사람으로 부풀려 보이도록 만들기 딱 좋다.


자기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만났던 연인들과 나는 늘 하나의 이유로 싸웠다. 연인과 함께 불편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그것을 연인이 해결해주길 바랐다. 그 문제가 정말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어떻게든 해결해주려고 노력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들은 내 안에 답이 있었다. 가족과의 다툼이나 우울증,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은 취업 같은 것들. 결국 내가 견디고 맞짱 뜨고 해내야 하는 일들을 연인과 결부시키려고 했다. 사랑이라면 그런 것도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정도는 되어야 대단하신 사랑이 아닌가? 평소에는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도 아니면서 굳이 사랑을 걸고넘어졌다. 그래서 몇몇은 노력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문제의 뿌리는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은 당연히 수포로 돌아갔지만. 


헤어지고 나면 그런 글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인과의 헤어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내 생에 없던 누군가와 둘도 없이 긴밀하게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다가 한순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기 때문이라고. 매일매일 나와 일상을 공유하던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경험은 상실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하기도 모자란 기분이다. 그는 없고 나는 조금 더 초라한 생에 남겨져 남긴 밥을 먹고 남긴 사람들은 만나고 남겨진 삶을 억지로 소화하는 듯한 기분은 정말이지 외롭고 쓸쓸하다. 그쯤 되면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뭉뚱그려져 결론을 도출한다. 다시는 연애를 안 해야지.


얼마 뒤 나는 곧 그 명제를 바꾼다. 다시는 그런 사람과 연애 안 해야지. 그 사람은 나와 맞지 않았고, 무궁한 앞날을 가진 나에게는 곧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환상을 갖는 단계로 넘어간다. 어느 정도 자기 정리가 되고 난 지금은 그때의 생각들이 너무 우습고 한 편으로는 가여울 지경이다. 아무리 자기 정리를 잘해 봐야 나랑 딱 맞아서 모든 갈등을 스르르 풀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자기 장인처럼 이것도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며 많은 관계를 쌓았다가 부쉈다가 해보고 내린 결론이다. 딱 맞는 사람은 정말 세상에 없다. 자기 정리된 사람, 정리되지 않은 사람 나눌 필요도 없다. 그냥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 연애한다. 여전히 누군가와 긴밀하게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전과 다른 건 어느 정도 자기 정리가 되고 난 후 내가 남들보다 그 일을 유독 재밌어한다는 걸 알게 되어 더 재밌게 할 방법을 강구하는 데 열정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내심 아주 오래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아는 언니는 10년 연인이 머릿속에 떠오른 다음날 먹고 싶은 메뉴까지 말하지 않아도 맞힌다고 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나? 그런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빈이 너도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여전히, 절대로 믿지 않는다.



연인 Lovers 카드를 들여다보면 아담과 이브에 집중하느라 뒤편의 나무 두 그루를 지나치기 쉽다.(아담은 생명의 나무고 이브는 죄와 욕망의 나무라고 한다. 아담은 남자고 이브는 여자고 어쩌고 저쩌고 남녀 이분법적인 어쩌고는 2022년에는 별로 설득력 없으니 각 나무의 성격 또한 가뿐히 차치한다.) 각기 다른 모양의 가지와 열매를 가진 나무를 등 뒤에 두고 연인으로 만났다. 카드 상단부에서 사랑을 이루게 해주는 천사 라파엘은 이 둘 머리 위로 손을 뻗고 무슨 생각을 할까? 둘이 아주 다르니까 치고받고 싸우며 살기를 말하진 않았을 테다. 서로 다른 나무를 품고 살아왔지만 그 안에서 안정과 조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연애는 둘만의 젠가 놀이 같다. 상대와 내가 번갈아 하나씩, 때로는 한쪽이 한두 개씩 블록을 더 쌓아 올리기만 하는 젠가 놀이. 누군가가 먼저 마음을 전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얼마나 흡족하게 돌아오는지 살펴본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빠르게 삐딱하게 쌓아 올린 블록을 회수하고 다시 쌓기 좋게 쌓아 올리느냐가 관건이다. 올려놓은 블록을 다시 회수하는 건 룰에 어긋나기 때문에 둘의 심기를 거슬러야 하며 때때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걸 고쳐 쌓고 넘어가지 않으면 더 높은 탑이 되었을 때 멋지고 대단한 탑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안한 탑이 되고야 만다. 나는 그저 나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연인과 함께 젠가 놀이 중이다. 다음날 먹을 메뉴를 맞히는 정도까지는 못 되어도 꽤나 높이 쌓은 탑을 보고 우리 꽤나 멋진 연애 중인데? 하고 자만할 정도는 쌓아보려 애쓰는.


둘만의 탑을 쌓는 과정이라고 낭만적이고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들여다보면 별 것 없다. 천생 물복파인 나는 얼마 전부터 딱딱한 복숭아를 좋아하는 연인을 보고 '무'를 좋아한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그걸 과일로 먹어? 소고기 넣고 국 끓여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무맛이야. 무맛." 그러면 천생 딱복파는 분개했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나는 그 뒤로 딱복을 절대 딱복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라고 표현했다. 그때마다 또 흘깃 째려보는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면서 이해할 수 없는 딱복파의 세계를 비아냥 거렸다. 복숭아가 나는 여름 내내 이 딱복 무 타령을 반복했다.


얼마 전 '뭐 먹을래?'라는 말을 '무 먹을래?'라고 오타를 내자 우리 둘은 동시에 딱복을 떠올렸다. 나는 이러한 고맥락 소통을 너무 사랑한다. 한국어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고맥락 소통이 다른 언어보다 수월하기 때문인데, 이 언어를 한 차원 이상 난도 높게 다룰 수 있는 사이는 돈독한 친구, 그리고 연인뿐이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의 긴밀한 시간 없이는 딱복은 무가 될 수 없다. 딱복으로 피식피식 웃을 수도 없다. 매일매일 둘만의 맥락을 쌓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가끔 자기 정리되지 않은 어설픈 모습도 나라는 사람의 맥락으로 이해해줄 수 있도록 밑밥을 까는 방법이기도 하다.


연애를 탑 쌓기로 치환하고 난 후에는 갈등을 해결하는 루틴이 더 간편해졌다. 관계가 위태로워졌을 때, 먼저 내가 잘 정리되어 있는지 살피고 그다음 상대가 잘 정리되어 있는지 살피고, 정리되지 않은 포인트를 둘이서 논의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최근까지 벌어진 대부분의 갈등은 내 상태(글이 잘 써지지 않음, 미래를 불안해함)를 정리하려고 애쓰면 해결되었다. 그 외의 문제는 나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딱히 내가 애쓰려고 들지 않는다. 연애에서의 내 몫은 언제나 나를 제자리에 돌려두는 것만 잘하면 된다. 제자리를 이탈했다면 잘 돌아가고, 너무 고여 있다면 물갈이해야 할 때를 아는 것. 우리 지금 꽤나 멋진 탑을 쌓고 있는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죽을 때까지 혼자만의 숙제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게 연애의 최고 장점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오늘도 묻는다. 나의 연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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