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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빈 Oct 10. 2022

칼 타투를 새기고 1년이 지났다

두려움과 하고 싶은 일을 분리하는 방법 | 마이너 아르카나 칼 1번

작년 한글날 칼과 장미 타투를 새겼다


내 팔에는 칼과 장미 타투가 있다. 2021년 10월 9일(한글날)에 나흘 남은 스물여덟 생일을 기념해 새겼다. 장미는 내가 받고 싶은 타투이스트 분이 특히나 잘하시는 사물이었기 때문이고, 칼은 타로카드의 의미를 따 왔다. 타로카드에서 '칼'은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결심'이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결단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 의미로 흘러간다. 하나 이상의 칼을 다루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칼을 꽂고 싶다'

누군가가 내 타투를 보고 왜 새겼느냐고 물어보면 이런 어마 무시한 대답을 내놓았다. 상대가 더 이상 물어보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순전히 정말 '칼을 꽂고 싶어서'가 맞기도 했다. 나는 콕 짚는 일을 잘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곧잘 해내고, 긍정적이고, 가족과도 잘 지내고, 그 누구도 싫어하지 않을 의견만을 내고, 뭐든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줄줄 줄지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어느 정도는 그런 나도 내가 맞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런 내가 답답했고 불행했다.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글을 곧잘 쓴다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작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남들 앞에서 내가 글을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패배자 같으니까 직장을 구했다. 일평생 작가를 꿈꾸는 직장인으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지만 또 돈을 펑펑 쓰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 그런데 그건 정말 돈을 벌어보지 못한 사람의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벌이를 하고 나니 분명해졌다.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었고, 밥벌이 정도 해주는 글쓰기 정도로는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글쓰기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조금 더 나만의 이유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남들도 다 사랑하니까, 같은 이유로는 충족되지 않는 나의 선호들을 예리한 칼날처럼 벼려두고 싶었다. 나는 모든 것들에게서 하나의 장점과 그에 따른 단점을 발견하는 사람이라서 금세 좋아하는 마음이 쉽게 사라지곤 하는데, 사라지기 전에 핀으로 고정해두고 싶었다. 꽤나 많은 지향점들이 모여서 칼 타투가 되었다. 지워지지 않는 칼을 팔뚝에 새기기로 했다.


장미 칼 타투의 모티브가 된 칼 1번 : 성공의 열망, 쟁취를 뜻한다


칼 타투를 새기고 달라진 건


내가 사랑하는 순간을 칼로 꽂아두자! 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타투이스트 분이 칼을 새기는 다섯 시간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이 칼이 없었던 내 생애를 곱씹어 보았다. 나는 왜 칼을 꽂고 싶을까. 칼은 잘못 다루면 다치고, 위험한 건데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결심들을 기어이 내 몸에까지 새기려고 애쓰는 걸까.


이십 년지기 친구가 나에게 '근본 없는 용기'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물론 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민하겠지만 너는 어느 순간 그냥 하고 있더라고. 그게 나는 대단해 보였어." 그 말은 절반만 맞다. 나는 사실 하고 싶다고 하면서 하지 않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이고, 고민만 하는 나를 견디지 못한다. 나는 도리어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들이 부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마음껏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나는 한순간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데 더딘 사람이다. 맛있는 걸 먹고 웃고 떠드는 일도 행복하지만 그것만 존재해서는 완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행복을 음미하기 위해서 엄선된 재료만을 쓰는 식당,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카페, 에메랄드빛 해변 옆에서 파도를 할 일 없이 지켜보기 등등을 해봐도 딱히 나는... 그냥 행복하긴 한데...라고 입으로 웅얼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심지어 그래서 여행도... 남들보다 안 좋아하는 듯) 다들 이런 걸 하면 행복하다던데 하는 것들을 따라 해 봐도 그다지 완전히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내가 그 일들에 대단한 욕망이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욕망하는 일들은 대부분 나를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뜨개질을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가방을 세 개씩 뜨고 있었다. 뭘 하나 하면 늘 그렇게 전보다 잘하려고 한다. 음치 박치였던 나는 맨날 혼자 노래방 가서 부른 노래를 녹음하고, 다시 듣고 다시 부르기를 반복하면서 제법 잘 부르게 됐다. 그래서 나는 행복했다.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거뜬히 해내고, 하지 못한 일들을 조금씩 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행복했었구나 그 칼을 새기면서 알았다.


하지만 그러면 아주 쉽게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할 수 없고, 나아질 수 없는 환경에서 더 나아질 수 없는 나를 다그치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칼을 빼들고 결단해야 한다. 좋아하는 글을 쓰고, 싫어하는 설거지도 해내면서 이별을 하든 종지부를 찍든 새로운 일을 벌이든 해서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곳으로 뻗어나갈 결심을 해내야만 한다.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하려면 나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 칼을 꽂겠다고 하고 난 이후로 나는 그런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무엇이든 해버리는 사람이니 그냥 하고 싶은 걸 잘해버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장편소설을 쓰고 싶다고 열망만 십 년 했던 나는 서너 달 만에 14만 자를 뚝딱 써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그 일을 한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글을 못 썼다고 비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이걸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까 봐 두려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나와 싸워 이기지 못해 진짜로 사라져 버릴까 하는 두려움들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소설을 쓰는 건 너무 재밌었다. 두려움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별개였다. 하고 싶은 걸 해버리자에만 집중했더니 두려움은 부수적인 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은 완성되었다.


이제는 뭔가를 시작하는 데 두려움이 전보다 사라졌다. 소설 못 썼다고 욕먹으면 어쩌지? 생각이 들어도 그냥 끝까지 쓴 사람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거기서 이미 나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필드 위를 달리는 선수는 적어도 그 경기 동안은 관중석에 앉은 구경꾼보다 축구를 잘할 것이다. '내가 저것보다 잘하겠다'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떻게 글을 잘 쓰냐는 물음에 나는 말한다. 내가 여태 일기든 덕질이든 일이든 글을 쓴 정량만큼 쓰시면 다 잘 쓸 것이라고. 나는 잘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그냥 많이 써 본 사람의 로열티를 믿기로 했다.


MBC 스페셜


내가 하겠다는 말을 책임지지 못해서 X 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또한 놀랍게도 나만 겪는 건 아니었다. MBC 스페셜 봉준호 스페셜을 보다가 뜬금없이 등장한 '자살 생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봉준호는 천만 영화의 CG 제작 결렬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편 나는 텀블벅으로 이미 돈을 받아놓은 소설 마감을 하지 못할까 봐 극단적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규모는 물론 다르지만, 내가 감히 나의 위로에 그를 인용해서 송구스럽긴 하지만, 거장도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망했다 싶을 때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건 나에게 많은 힘이 되었다. 저 사람도 저러는데 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 좀 낫다. 눈물 닦고 하던 일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봉준호 외에 그림 그리기 싫어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업 하나도 안 했는데 포스터에 이름 나와서 멘붕 온 프리다 음악감독 짤... 같은 것들에도 힘을 얻는다)


그래도 그들은 기어코 끝까지 해낸다. 베일까  불안하고 괴롭고 두려운 마음을 견디고 세상에 자신의 칼을 선보인다. 하고 싶은  있다면서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른다. 두려움을 뚫고 해내고  뒤에 오는 쾌감 같은 것을. 하고 싶은 것으로 나를 드러내는 즐거움이 어떤 기분인지 말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몰라도 일평생을 살아가는  아무 문제없다.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세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살아가는 일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러나 장인이 마치 보석처럼 갈아놓은 칼을 보고  눈을 반짝이는  같은 사람한테는 평생에 걸쳐서 겪어보고 싶은 일이다. 거기에 내가 사는 가치가 있다는  이제는 절실하게 알고 있다.



세상이 점점 거센 속도로 빙글빙글 도는 걸 느낀다.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거나 '현재를 즐기라'던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갑자기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갓생을 살라고 하고... 주식 안 하면 바보라더니 이제는 적금이 최고라고 하고... 매주 뉴스를 보다 보면 그런 인생 트렌드 같은 것에 몸을 내던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희비를 겪는지 실감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갑자기 영상 트렌드에 뒤처지는 사람이 됐다가도,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되기도 하고, 돈을 좀 안 모았더니 철딱서니 없는 애였다가도 젊음을 즐길 줄 아는 애가 되기도 하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세상은 나를 자꾸만 어떤 사람으로 포장하려고 한다.


어찌 됐든 나는 칼을 쥐고 황량한 세상에 혼자 서 있다. 그저 내가 쥔 칼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다. 글을 완성하고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 언제나 그 일은 두렵다. 끝까지 쓰는 건 너무 힘들다. 끝까지 해내는 과정의 고통은 시작을 미루게 만든다. '나는 완벽하고 싶은 사람이라서,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하지 않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많은 시간이 이미 많이 흘렀다. 언제고 완벽할 수 있는 때는 오지 않는다. 오늘도 거지 같은 글을 쓰면서 나를 자책하겠지만, 또 언젠가 내 글을 읽고 즐거울 사람들의 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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