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음의 이면 | 메이저 아르카나 19번 태양 카드
나는 낙관적인 사람을 본능적으로 기피한다. 잘못 들었나 싶겠지만, 희망을 갖고 앞날의 일이 잘되어 갈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보면 '으, 싫다'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중에서도 대뜸 나에게 "잘 될 거야! 파이팅!" 응원을 날리는 사람들은 더더욱. 최근에는 그런 대책 없이 낙관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도 생겨났다. 대가리 꽃밭.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제 식대로 예쁘게 꾸민 꽃밭 밖에 없어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정신 승리한다고 말이다.
타로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카드가 있다. 밝고 환한 태양 카드이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카드들은 모두 어둡고 불안해 보였다면 태양 카드는 전혀 반대의 의미를 품고 있다. 완성과 성취, 어린아이의 순수함, 시작 등 카드를 펼치기만 해도 밝고 찬란한 미래가 연상된다. 어린아이는 말을 타고 어디든 갈 수 있고,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아주 붉은 천을 휘날리면서 활기찬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러나 나는 왠지 이 카드가 반갑지 않다. 앞서 말했던 낙관적인 사람들을 마주할 때와 같은 기분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싫은 이유도 사실 그들에게 있지 않다. 그들로 인해 상기되는 과거의 내가 싫을 뿐이다. 밝고 희망찬 사람들은 자꾸만 내가 과거에 쌓았던 많은 업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낙관과 희망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 착각한 내가 얼마나 많은 순간, 무심코 남의 불행을 작고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절하했는가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불행에도 무턱대고 '다 잘 될 거야~'를 외쳤을까 봐, 그렇게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얘기로 의욕만 떨어뜨렸을까 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다.
“죽고 싶다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데 ㅠㅠ 죽지 마.”
“네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좋은 점도 많을 텐데.”
(*실제 발언이며, 더 쓰면 스스로가 괴로워짐)
어려서 나는 비관은 불행으로, 희망은 행복이라고 연관 지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마다 '아, 이건 불행한 거야'라고 홱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외면한 곳에는 어디선가 주입된 희망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는 분명 성공할 거고 실패란 없을 거고 내 꿈은 마치 2002년 월드컵처럼 '꿈☆은 이루어진다'로 자동 완성될 거라고. 당시 엄마 아빠 말을 어기고 공부를 안 하거나,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질 않거나, 창문과 문을 깨부수던 소위 중2병 걸린 친구들을 비웃고 인생에 쓸 데 하나 없는 마케도니아 제국의 왕 이름을 잘 외우는 것을 으스대기만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건 진학할 대학이 결정된 열아홉, 스무 살 즈음이었다. 과거 재물손괴범이었던 친구들은 이제 슬슬 순둥이의 얼굴을 하고 각자의 방황을 끝낼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한치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쓰나미처럼 내 속에 물음표가 쏟아졌다.
나는 성공할 것이다. 꼭 해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대학은 고민에 불씨를 더했다. 갑자기 내 인생을 관통하는 트라우마를 주제로 글을 써오라지 않나... 동기들이 쓰는 시는 뭔 소린지도 모르겠는데 교수한테서 칭찬 또는 혹평을 받았다. 문학은 수학 점수처럼 잘하고 못하고가 뚜렷하지 않아서 고개만 몇 번 갸웃거리고 나면 거금 몇 백만 원짜리 수업이 끝났다. 혼란한 와중에도 나는 희망적이고 밝아보려고 애썼다. 순우리말 예쁜 사랑 시를 수업 때 제출했고, 별다른 평가도 받지 못했다. 첫 소설은 제목이 미역국이었다는 것 빼고는 내용이 기억도 안 나고 학점만 B를 받았던 것만 생생하다. 그때 쓴 모든 글은 누가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리멍덩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나도 나를 잘 몰랐기 때문에, 거기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태양 카드 속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말 위에 올라타 있었던 것이다. 말고삐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모르면서 이끌리는 대로 가면서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 밝은 태양 아래 바르게 가고 있다고 믿었던 길들은 너무 환하게 잘 보였던 세상의 이정표를 별생각 없이 따랐던 것뿐이었다. 다 내가 원하지 않는 골목들을 돌아온 거였다. 나는 나를 절대 오해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는데, 그 단언부터가 커다란 오해의 시작이었다는 걸 첫 직장을 그만둘 때쯤 알았다. 안정적인 직장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구나. 그간 내가 바랐던 직업들은 정말 내가 원했던 건 없었구나. 대낮 같이 밝은 가족의 품을 벗어나, 기껏 4년제 대학 나와서 취업도 못하고 5평짜리 방에서 불 꺼진 어두운 현실을 마주하고 나서야 내가 보였다.
나는 아주 비관적인 사람이었다. 태어난 기질이 그랬다. 자라오면서 잠시도 낙천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엄한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언제나 귀갓길이 무서웠고 시험 기간 한 달 전부터 벌써 점수를 낮게 받을까 봐 걱정하면서 잠을 설쳤다. 친구들은 나를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다 미워하기 때문에 애써 그 친구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려고 부러 뒷걸음질을 쳤다. 생일 파티를 하면 친구가 없는 게 들통날까 봐 엄마한테 조르지도 않았다. 내가 친구들이 신는 비싼 신발을 신으면 우리 집이 망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부터 먼저 떠올리는 나도 싫어서 어떻게든 희망차고 밝은 아이처럼 굴었다. 졸업하고 작가의 길에 도전하지 않은 것도 결국 작가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부정을 거듭하며 결정한 것이면서 돈을 벌고 싶어서, 그 일이 하고 싶어서 취업한다고 둘러댔다. 내가 꽤나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을 때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정말 얼마 전까지도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를 안다. 완전히 인정하고 나서 나는 아주 거대한 안도감에 휩싸여 근원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박쥐 체질인 내가 억지로 동굴 밖을 나서는 기행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보고 많이 우울해지고 차분해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원래 그랬다. 생각이 많고, 누군가에게 상처 줄까 노심초사하고, 미안한 게 많고, 모든 일을 기어이 복잡하게 만들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에 주어지는 것들에 곧잘 만족하면서 희망찬 앞날을 그리면서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처음 쓴 장편 소설은 그런 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릴 적 나를 아는 친척 어른이나 친구들은 그 소설을 읽고 “유빈이답지 않게 내용이 너무 우울하더라”라고 말하고, 최근의 나를 아는 이들은 그 소설이 “그냥 완전 네 얘기더라”라고 한다. 정말 그 소설이 나 같은지는 나도 모른다. 작품이든 사람이든 보는 사람마다 언제나 다르게 평가되니까.
내가 우울하고 비관적이라 해서 남보다 더 특출 나게 불행하지도 않다. 내가 감히 예상했던 수많은 실패, 섣부른 걱정들이 나를 지치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므로. 희망과 행복, 비관과 불안과 불행을 별개의 것들로 구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좀 더 가벼이 불안해지고, 좀 더 쉽게 불행에서 벗어나고, 좀 더 편안히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을 내 안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난 후 나는 내 감정을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재밌다고 얘기해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제 내 글에 진짜 내가 있으니까.
비관적인 걸 인정하고 나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흔쾌해졌다. 그래, 나는 아주 비관적인 사람이니 너네가 싫어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어. 나는 다 예상했는 걸? 하고 배짱도 부릴 수 있다. 오히려 낙관적인 사람보다 더 선뜻 낙관적인 미래를 얘기할 수도 있다. 그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때까지 나는 무한히 비관하고 의심하겠지만 결국 그래서 그 미래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테니까. 이제 나 자신을 모른다는 이유로 한없이 괴롭고 외로운 타인의 문제를 더는 눈 가리고 아웅 하거나 멋대로 축소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도 살포시 보태본다.
두 살 터울 남동생과 나는 아주 반대였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1등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삶을 살았던 나와 달리 동생은 공부도 안 하고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마인드로 현생을 즐기는 유형이었다. 나는 학원에 가지 않으면 불안했지만, 동생은 학원에 가야 해서 불만스러웠다. 시험 전에는 날밤을 새는 일이 부지기수였던 나와는 달리 동생은 무슨 시험이 자신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일찍이 잠들었다. 재밌는 건 우리가 근 20년간 같이 사는 동안 티 내지 않고 내심 서로를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장남으로 태어나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으며 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푹 자고 재밌게 노는 동생을 내가 부러워했던 만큼 동생은 장남인 자신보다 부양 책임이 적고, 어딜 가든 어른들의 칭찬과 주목을 받는 나를 부러워했다. 서로의 삶을 시기 질투하면서 참 많이도 싸웠고 상처 주는 말도 많이 주고받았다.
그런 우리는 ‘직장인’이라는 공통된 상황 앞에서 마음이 통했다. 밥벌이는 어딜 가나 그지 같아서, 너무도 다른 우리를 같은 처지로 만들어주었다. 평소에는 뭐함? 집. 언제 와? 이런 대화만 하다가 어느 날 그냥 갑자기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에서 서로의 회사 생활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고 대단한 누나도 회사에서 자기를 쓸모없다고 생각하는구나.”
“안 그런 사람이 없을 걸? 그리고 나 그렇게 공부 잘하지 않았어...”
“그래? 그래도 나보다는 잘했잖아. 나는 잘하는 것도 없고...”
“네가 잘하는 게 왜 없어! 사소한 것에도 잘 행복해하잖아. 나는 네가 부러웠어. 너는 네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았잖아. 나는 그걸 잘 모르고 공부만 했어.”
그 통화 이후에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됐다. 정확히는 세상이 우리를 너무 많이 미워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가끔 주고받는 메시지에도 그런 믿음이 있다. 엄마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은 우리가 철이 들었다고 말하지만 이건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동생은 나보다 어리지만 나에게 부모 그 이상의 존재다.
한 배에서 난 동생과 나도 이렇게나 다른 삶을 사는데, 타인은 어떨까.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서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는 걸 아주 쉽게 잊고 산다. 내 것이 아닌 삶을 부러워한다.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따라 하고, 뒤쫓기도 한다. 그것들이 우리를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아주 뒤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내 몸에 들어맞지 않는 장기를 이식하거나 피를 수혈하면 우리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자칫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살아온 방식을 타인에게, 타인의 방식을 나에게 이식하려는 시도는 그만치 위험하고 주의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남들이 다 좋다는 것 사이에서 내가 유난히 싫어하는 게 있다는 걸 솔직하게 시인해야 할 필요도 있다. 나를 알아간다는 건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좋아하는지를 찾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이 내리쬐는 대낮에 움직이는 게 체질인 사람도 있을 테고, 해 질 녘 어스름에서야 몸을 달싹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남들 다 나이 차면 하는 결혼이 내 행복에는 종착역이 아닐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빌드업의 과정일 수 있다. 회사에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생활이 흡족할 수도 있고, 불안정하더라도 일하는 만큼 버는 삶이 제격일 수도 있다. 비관적이라 무엇이든 걱정하면서 살 수도, 낙관적이라 모든 일의 좋은 면을 먼저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 뭐가 더 낫고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