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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빈 Oct 23. 2022

죽고 없는 이들에게 묻는 안부

우리와 함께, 잘 지내고 있지요? | 메이저 아르카나 13번 죽음 카드

타로카드에는 13번 죽음Death 카드가 있다. 타로를 봐줄 때 죽음 카드가 나오면 상대와 나 모두 곤란해진다. 간절하거나 원하는 바가 있어서 카드를 뽑았다가 죽음을 맞닥뜨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읽기 편한 카드는 공부하기 쉽지만, 죽음 카드처럼 어두운 카드는 그 의미를 더 면밀히 살폈다. 죽음 카드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꼭 그 뒤에 단서가 따라붙는다. 죽음으로 끝났지만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작이 있을 거라는 것을.

딱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죽음 타로카드


'새로운 시작'이라는 알 듯 말 듯한 의미에 가로막혀 공부는 진척되지 않았다. 죽으면 끝이 아닌가? 볼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만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게 된다. 사람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천차만별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손 써볼 도리도 없이 삶이 '끝난다'는 점 때문에 죽음을 겪고 싶지 않았다. 우울증이 극심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그 길목에는 언제나 손유빈을 완전히 종료해야 한다는 경고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그러면 나는 겁에 질려 다시 삶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필코 악착 같이 현재를 누려야 한다고 설파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대로 나는 나를 끝내기에 아쉽고, 안타까웠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이라니. 죽었는데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로 끝나버릴 텐데.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조금 용기를 드리고자 잠시 시간을 할애하겠습니다. 아빠가 지금 보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 아빠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음이라는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작년 한 해 동안, 내 첫 장편 영화였던 '너와 나'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나는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거를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영화를 준비하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아주 중요했던 이름들, 박길례 선생님, 김용균 군, 변희수 하사, 그리고 이경택 군, 외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아랑쓰, 그리고 세월호의 아이들, 특히나 예진이, 영은이, 슬라바, 정무, 나는 이들이 분명 죽은 뒤에도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요 소란스러운 일들 잘 정리하고 금방 가겠습니다.
-백상예술대상 남자조연상 배우 조현철 님의 수상소감


배우 조현철 님의 백상 수상소감을 듣고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다른 틈이 생겼다. 그간 나는 죽어서 별이 된다거나 우리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다거나 그런 말들을 무척이나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끝이지, 뭐 그렇게까지?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수상소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죽으면 다 끝난다고 단정 지었던 건 내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삶이라는 것을 인간의 육신이 숨을 쉬며 생을 영위하는 행위에만 국한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삶이란 숨이 끊어진다고 해서 그렇게 단출하게 종료되지 않는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 그 안에 아직 그 사람들이 살아있다.



진은영 시인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는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유예은 양을 추모하는 시가 실려 있다. 유예은 양의 목소리로 진은영 시인이 발화한 '그날 이후'라는 시가 그것이다. 아빠 미안,으로 시작하는 시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사고로 돌아간 예은이 가장 먼저 엄마와 아빠,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고하고, '그곳'에서 자신은 언제나 잘 있다고 말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눈물을 훔치면서 시를 읽었지만 나는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시를 써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발언권이 더 이상 없는 생명을 이렇게 대변해도 괜찮을까? 그들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데 괜찮을까? 하는 우려였다. 시집 말미의 신형철 평론가의 서평은 그 우려에 답을 주었다.


<중략> 시인은 이런 것을 물어야 한다. '그런 시 쓰기는 고인을 이용하는 일이 아닌가?'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고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생일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인에게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시를, 바로 유가족이 원했으므로. "나는 잘 있어요"라는 아이의 말을 그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 듣고 싶어 했으므로. 이 경우는 시인이 아이를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유가족의 수단이 되는 일인 것이다.


서평은 지속적으로 그 뒤에 이어올 의문과 우려를 종식시켜주었다. 나는 이 시가 분석할 것까지 없다 싶었다. 유가족에게 위안이 된 것만으로 감히 이 시의 쓰임이 다 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형철은 그 부분까지 파악해 시를 분석했다. 죽은 아이가 해야 할 말을 이 시가 얼마나 적절히 들려주고 있는지, 살아 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적혀 살아야 할 이유까지 마련해주고 있음을 짚은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은 시집을 사서 읽기를 추천한다)


예은 본인을 제외한다면 예은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곳은 부모의 내부일 것이다. <중략>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일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또 소통하면서 그를 자기 안에 들인다. 이 일이 쌍방향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서로를 나눠가지면서 '나도 그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된다. 내 말과 행동 속에 그의 영향이 배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내 안의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유퀴즈온더블록에 출연한 김상욱 교수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양자 역학에서 우린 원자 형태로 영생할 수 있다"라고. 그래서 우리는 죽어서 나무가 될 수도, 별이 될 수도, 강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는 오래 함께 연구하던 친구가 죽음을 맞이하고 든 생각이라며, '정말 위안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학문 외의 영역이나, 죽음을 다루는 그 어떤 곳에서도 완전한 끝이라고 닫아두지 않으려 한다. 원자로든, 귀신으로든, 어떤 사물로든 죽음을 맞이한 대상은 다른 모습으로나마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다. 나와 소통하는 그 모든 순간, 그 이후까지 그는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마당 밖을 바라보면 보이는 빨간 꽃으로도 살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가장 밝은 별에도 산다. 잠자리를 뒤척이다 꾸는 꿈에도 살고, 번번이 살아낼 내일에도 산다. 죽음은 그래서 완전한 끝이 될 수 없다. 삶보다 희미하지만 그래서 더 아스라이 오래 버티고 서 있다.



이번 글에는 인용이 많다. 나는 아직 내 인생에 새겨질 죽음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나는 죽음 카드가 말하는 새로운 시작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죽음이 말하는 '새로운 시작'이 환생이나 부활 같은 단순한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상실에는 면역이 생기지 않겠지만, 분명히 나는 아주 절망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는 두려움을 줄여줄 말 몇 마디는 부적처럼 지니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앞으로 나와 아주 많은 날들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 죽고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도 여러 번 모습을 떠올리고, 무한히 안부를 물을 거라고.


그와 더불어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조현철 님이 읊조렸던 것처럼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이름들 옆에 그들을 세워둔다. 2022년 9월 14일 신당역에서 목숨을 잃은 역무원, 2016년 5월 17일에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무참히 죽임을 당한 내 또래 여자아이. 그들도 분명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살아있는 나는 그들이 바랐던 세상의 새로운 시작에 관한 책임을 느낀다. 무기력으로 접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대단한 과학의 발전이 있지 않는 한 모두에게 참인 명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죽은 자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 어디에는 그들이 존재하고, 그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열심히 곱씹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죽음에는 죽음만이 있는 건 아니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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