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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빈 Aug 22. 2022

미움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요

다들 조금씩 나를 미워하겠지만 | 마이너 아르카나 칼 10, 칼 3번

"야, 우리 반 애들이 다 너 싫어해. 너만 몰라."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제는 친구라고 불러주기도 어색할 지경인 같은 반 아이의 말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 무한히 재생된다. 나를 무척이나 싫어한다고 정평이 나 있는 친구였다. 왜 싫어하는지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조금만 다가갈라치면 그 아이는 나에게 "아, 존나 싫어"를 연발해댔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든 어딜 가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꼭 존재했다. 나와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으면서 아주 잘 아는 양 싫은 점을 읊어댔다. 심지어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온 말들이 메아리쳐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그때의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런 소문 속의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중언부언 설명하며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으로 증명하려 애썼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해명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었나? 절대 아니었다. 그런 해명을 하는 나를 더 구질구질하게 여기는 듯했다. 짙고 짙은 흑연을 아주 단단하고 반질거리는 지우개로 문지르면 지워지기는커녕 되려 아무것도 묻지 않은 곳마저 검은 자욱으로 물들어 버린다. 그들은 내 말을 자기 멋대로 받아들였다. 떳떳하면 그런 해명을 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거였다. 나는 그럼 또다시 자책하는 것이다. 내가 또 무슨 말을 잘못했지, 또 무슨 행동으로 밉보인 거지? 이런 말을 왜 했을까 정말 후회된다. 무한한 반복으로 다친 적 없는 마음까지 악의가 침투하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그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내가 자욱들을 문질러 손댈 수 없는 자리까지 번지게 만들었다.


미움에 취약한 사람이 살아남는 방법

미움을 받게 되면 언제나 나는 비상시가 된다. 사람들마다 미움에 대한 역치가 다를 테지만 타인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나에게 미움받기란 늘 재난에 가까웠다. 각기 상황에 따른 대처 매뉴얼을 마련해둔 적도 있다. 내가 어땠다더라는 몇 마디의 험담 정도는 무시하거나 비슷하게 되갚아주고, 면전에서 티 내는 경우에는 친구들과의 단체 카톡방에 오늘 살인날 뻔했다고 쎈 척하면서도 상처받은 나를 위로해주길 기다리고, 아주 아주 극악무도하게 나를 괴롭히는 경우에는 글로 박제해 어딘가에 투고하기에 이르렀다. 미움받기를 꺼리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려고 애썼다. 상대해주는 것도 귀찮아한다거나, 직접 맞짱을 뜬다거나, (따라 하진 못했지만) 근처의 물건을 부순다거나...


당연하겠지만 나에게 친구들의 미움 처리 방식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네가 뭔데!라고 맞받아쳐놓고도 '혹시 내가 그렇게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여전했다. 니들이 뭔 상관이야! 나는 내 길을 갈 거야! 뭣도 없는 배짱을 부리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지내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잘 지내다가도 미움과 맞닥뜨리면 나는 꽁꽁 얼어버려 생각하기를 멈췄다. 상온의 얼음이 서서히 녹듯이 마음이 일상생활 중에 스르르 녹을 수 있게 다른 곳에 시선을 팔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역시 부처가 아닌 나는 불쑥불쑥 '아니, 근데 그 새끼가!' 하고 급발진했다.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면 현저히 신선도가 떨어지는 냉동 닭가슴살처럼 물러터지는 마음을 두고 인정해야 했다. 나는 미움에 아주 취약한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이 정도로 미움이 힘들다 징징거리면 '그냥 신경 안 쓰면 되잖아! 미움을 사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라는 목소리가 아이유 콘서트 영상의 '뭐가 살쪄!' 톤으로 어디선가 들려온다. 남 일에 도통 관심이 없고, 현실적인 사람들의 시니컬하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이다. 사실 그게 맞다. 미움을 사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나. 미움받아 골머리 썩는 중에도 나는 안다. 정말이지 그 미움과 내 인생은 관계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아무리 '남들에게 미움받아도 괜찮아'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안 괜찮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나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더 구질구질하고 더럽게 미운 구석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 사람은 고작 그 정도 범위의 나를 미워하겠지만... 그리고 그 범위는 영원히 더 커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 사람의 미움은 내 존재의 미운 구석 속속들이 파헤친다. 내 미운 구석을 잘 감추며 살아왔다고 믿었건만 누군가에게 그걸 죄다 들통난 기분에 속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나를 너무 미워하고 못났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내가 강적으로 돌변한다.


그 친구(= 또 다른 나)는 비겁하다. 근래에 나를 괴롭히던 고민과 게으름,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피해를 끼친 순간들을 다 끄집어와서 나를 비난한다. 끼니를 잘 챙기지 않았거나 잠을 못 잤거나 근래에 갑자기 살이 찌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그 친구는 힘이 엄청나게 세지고, 목소리가 커진다. 한참 동안 나만 알고 있는 내 미운 구석을 잘도 줄줄이 읊는다. 타인이 건드린 미운 구석은 그 어디에서 절묘하게 합을 이룬다. 역시나 그 사람이 맞았어. 넌 못났고 못났으며, 또 못났다. 그 모든 과정이 대략 일 분 안에 태풍처럼 내 안을 후루룩 초토화시킨다.


칼 10번과 칼 3번 타로카드

타로카드에서는 그런 상태를 대부분 칼로 설명한다. 칼은 예리한 날을 활용해 자르고 깎는 도구이자 베고 상처 입히는 무기로 수많은 상징을 가진 물건이다. 타로카드에서 칼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한다. 칼 하나를 쥐고 무언가를 베어보려고 결심하는 것(칼 1)부터 10개의 칼에 찔려 그야말로 회복 불가능 상태의 마음까지 날을 세우기도 하고 가차 없이 들쑤셔지는 마음들을 묘사한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미움에 초토화된 나는 언제나 칼 10 카드 속 전사한 인물처럼 이제 더 이상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축 늘어져 썩어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칼 10의 인물은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마음만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다. 죽은 마음을 붙잡고 또 밥 먹고 일하고 운동 가고 살아가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나는 미워 죽겠는 나와 앞으로 무수한 날을 살아가야 하고, 내가 벌여놓은 일들을 책임져야 하니까. 절망했다고 해서 회사를 안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헛소리나 중얼거리면서 울며 불며 내 몫의 일을 해내야 한다. 그러려면 칼 10의 상태로는 어림도 없다. 저 칼들이 그저 해적 룰렛에 꽂힌 미니 플라스틱 칼이려니 생각하거나 10개는 너무 많으니까 한 세 개 꽂힌 사람처럼 지내야겠다고 타협한다.


굳이 칼 3번을 언급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트를 가로지른 칼 세 개. 이 카드를 뽑고 나면 내 앞에 앉은 모든 이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이거 안 좋은 카드지?' 물어보지만 나는 늘 때에 따라 다르다고 답한다. 카드 속 칼은 누군가가 무참하게 찔렀다고 보기에는 3개가 대칭을 이루며 가지런히 꽂혀 있다. 타로카드에서 3은 다리가 세 개일 때 쓰러지지 않는 의자처럼 언제나 최초의 균형을 의미한다. 누가 칼을 가지런히 꽂았을까? 마음의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를 가진 타인이나 상황은 그냥 무턱대고 칼날을 들이대지 절대 균형을 잡고 누군가를 찌르지 않을 것이다. 심장에 박힌 세 개의 칼은 내 마음속에서 이 상처를 어떻게 바라볼지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이 잡혔음을 의미한다. 내 선에서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찔린 상처를 휘적대면서 칼이 균형에 맞추어 꽂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잔인하긴 하지만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찔릴 상처에 대한 예방접종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듯도 하다.


어찌 됐든 사람들은 미움받는 일을 두고 처리 방식을 두거나 칼 10이니 3이니를 설명하는 나를 두고 뭐 저렇게까지 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멘탈이 약하다고 쯧쯧 혀를 찰지도? 하지만 나는 얼마 전부터 이런 성향의 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어떠한 미움이 나를 덮쳤을 때 내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면밀히 정리해봤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미운 구석을 헤집었을 때, 나는 영락없이 초토화되었으나 번번이 빠르고 정확하게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누가 내 목에 칼을 대고 정말 그러했느냐고 물어와도 나는 지체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미움받는 데 취약한 사람이지만 초토화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름의 3원칙도 세웠다.


1. 미움을 표출하는 데 합당한 이유는 없다.

나는 주로 '나댄다'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그 표현에는 이골이 나버려서 별 생각도 안 든다. 표현을 아끼지 않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흥이 많은 나에게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얘기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하려는 에너지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무언가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 그들에게 선 넘게 행동했을 수도 있고,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은데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뭐라도 말을 얹고 싶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합당한 이유를 내주지 않는다. 그럴 필요를 못 느끼거나 딱 잡아 표현하면 스스로가 못나지기 때문이다. 나더러 나댄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날릴 정도로 1차원적인 사람이라면 그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깊이 있게 생각할 리가 없다. 또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구구절절 이유를 대며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다. 내가 좀 더 발전하길 바라든지, 별생각 없든지. 대체로 후자다. 별생각 없이 타인을 구구절절 미워하고 공격하는 치들이다.


미워하는 데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모든 일이 그렇듯 당연히 예외는 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해했거나 해하려 들었다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거나...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복수심에 불타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모두 마음의 영역이다. 미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기에 누구를 미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른 합당한 이유도 저마다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출해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다른 문제다. 그 미움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것까지 합당할 수는 없다. 일을 못해서, 사회성이 없어서, 말을 이상하게 해서, 재수 없어서,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남의 말을 안 들어서 등등의 이유로 '표출하는' 미움들은 그 자체로 합당하지 않다. 합당하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건 그저 괴롭힘일 뿐이다. 비겁한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글만 보고 화났다가 댓글 보고 사격 중지한 인스티즈 캡처


2. 대단한 사람들은 더 대단한 미움을 받는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조금은 억울해진다. 왜 쟤는 나한테 저럴까? 왜 하필 내가 타깃일까? 하는 것들 말이다. 애석하게도 그의 시선에 내가 걸리적거린 것밖에 없다. 나를 몰랐으면 나를 미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감히 나를 알아버려서 또 나를 굳이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은 미움을 다뤄야 하는 이유는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 10명 중에 7명은 무관심하고 2명은 나를 싫어하고 1명은 나를 좋아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정말 오래도록 끌어안고 살아서 이제는 다 해질 지경인데 또 여기서도 써먹는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더 알려질수록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수 안티가 7천만이고, 슈퍼스타들은 정도를 넘어서는 안티들을 달고 산다. 나는 예수도 아니고 슈퍼스타도 아닌데 왜 미워해! 울화통이 치밀다가도 그래, 이 정도 미움이라면 슈퍼스타 풀네임은 아니더라도 시옷 정도는 되지 않을까? 자의식을 과잉시키며 스스로를 달랜다. 제 나댐이 기어이 당신네들 눈깔 앞에까지 도달하고야 말았군요. 아멘. 유사 처방으로는 유행이 지난 감이 있지만 "아, 역시 내가 너무 귀여운 탓인가"가 있다.


3. 미움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나를 미워하는 저 사람의 비겁한 자기 합리화다"라며 상대를 냅다 격하시키기도 하고 "나도 알고 보니 안티가 있을 정도로 슈스?"라고 비대한 자의식을 자랑해도 감당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래도 나의 미운 구석이 문제였던 것 같고, 내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는 자책이 가슴속에서 지진을 일으킨다. "왜 그렇게 나대?"라고 말하는 사람을 위해 최대한 나대지 않으면 평화가 찾아올까? 표현을 아끼고 나대지 않으면 그게 나일까? 나를 아끼는 이들은 태도가 바뀐 나를 두고 어디가 아픈지 걱정할 테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바꿀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터무니없는 미움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겠다는 거다. 이게 가장 쉽지 않은 단계다.


나는 맨날 이 과정에서 어떤 상상을 더한다. 뽀얀 흰 천으로 만든 가방에 국물이 시뻘건 김장김치를 가득 담아서 대구부터 서울까지 이고 지고 올라와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국물이 새지 않도록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락앤락 용기에 비닐로 싼 김치를 넣고, 꽁꽁 묶어 뚜껑을 닫는다. 거기다가 두세 겹으로 비닐을 더 싸고, 방수가 잘 되는 도시락 바구니로 한 겹을 더 싼다. 혹시 가방에 묻을 수도 있으므로 어두운 색 계열의 손수건을 가방 바닥에 한번 더 깐다. 그쯤 되면 그게 김치인지 아는 사람은 김치를 준 사람과 나밖에 없다. 나는 타격을 입은 내 미운 구석을 그렇게 돌돌 감싸서 내 마음 한 편에 보이지 않게 넣어둔다. 애초에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겹겹이 싸 두었다가 김치가 쉬지 않게 온도를 유지해줄 냉장고를 마주한 순간처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그걸 풀어보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 미운 구석은 이렇게 처리해야겠군. 생각해보니 이런 건 자제해도 되겠다, 타이밍을 잘 봐야겠다며 호의적인 마음으로 나의 미운 구석을 밉지 않게 보강할 뿐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나도 지키고, 스스로를 발전시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라 기쁘다.



미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상상에 김치가 등장한 이유가 있다. 김치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들고 와도 어느 틈에 새어 나와 가방을 더럽힌다. 김치를 탓하지도 못하고, 왜 나는 또 꽁꽁 싸매지 않았나 자책한다. 타인이 표출한 미움들도 불시에 나를 어지럽힌다. 아무리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기어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좀먹곤 한다.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또 무력하게 기회를 내주고야 말 때도 많다.


그러면 나는 도처에서 나를 괴롭히는 미움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1999년부터 올해까지 통틀어 인문학 누적 베스트셀러 1위라고 한다. 나는 그다지 이 책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찾는다. 책의 성공은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시사한다기보다 얼마나 많은 미움이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지 확언해준다. 미움받기를 어려워하는 무수한 사람들도 떠올린다. 연예인이 될 수도 있고 지난주에 만난 내 친구일 수도 있고, 타로 상담을 받으면서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토로한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그 사람들도 미움받으니까 나도 미움받아도 돼'라고 위로하는 건 아니다. 미움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세상을 여러모로 상기하는 것이다.


그럼 결론은 언제나 이 험난한 미움 속에서 나는 나를 지켜야 한다로 귀결된다. 타인에게 미움받기를 견디지 못하는 나를 나까지 혐오할 수는 없다. 나는 무수한 미움에 얼고 녹고 물러터지면서 죽기 직전까지 나를 미워했지만... 소위 말하는 쿨한 사람을 동경하지도 않고 쿨해질 수도 없으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나를 미워하는 데 썼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초토화된 마음을 일으키면서 가능하다면 나의 초토화를 기억하고 미움을 표출하면서 타인을 초토화시키지 않으려 마음먹는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가 미울 때가 많지만 수많은 미움들 사이에서 비굴하고 못나지지 않으려 애쓰는 내가 참 애틋하다. 다들 조금씩 나를 미워하겠지만 나는 언제나 언제나 나를 애틋하게 보듬어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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