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싫은 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8번 힘 카드
느릿느릿하게나마 헬스 PT 40회를 넘겼다. 바디 프로필을 찍고, 운동 관련 자격증을 준비하는 사람들 틈새에서 그저 생명 유지를 위해 꾸역꾸역 헬스장으로 향했다. 운동하면서 느낀 바는 아주 많다. 세상에는 좋은 몸을 가진 사람이 아주 많고, 건강한 몸은 정말로 건강한 정신을 가져오고,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수많은 깨달음 중에 인상 깊은 대목은 역시 남들에게 들었던 진리보다 외면하고 싶었던 내 속의 진실이었다.
나는 유산소 운동이 싫다
유산소 운동은 에너지를 산소 대사를 통해 얻는 지속적인 힘을 내어야 하는 운동이라는데, 솔직히 체내에 작용하는 원리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에게 유산소 운동은 '헉헉헉헉' 숨을 내쉬어야 하는 운동이다. 무산소 운동은 뭐냐고? '흡! 하... 흡! 하...'하는 운동이다. 숨을 지속적으로 쉬어야 하느냐, 멈추었다가 쉬게 하느냐의 차이다. 호흡의 차이를 굳이 짚는 이유는 마스크를 쓰고 운동해야 하는 실내에서 헉헉헉헉 운동은 사람을 아주 미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대체 왜 운동을 '헉헉' 거리기까지 하면서 해야 할까? 유산소 운동은 그냥 적당히 숨을 고를 정도로만 하면 제대로 운동 효과를 얻을 수가 없다. 알아서 피부 모공으로 지방이든 이산화탄소든 알아서 지방을 배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굳이 숨이 턱 막히는 마스크를 끼고 열심히 호흡해야 한다. 유산소 도중 숨을 못 쉬어서 혹시 산소 부족으로 쓰러져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하루에도 열 명 이상 트레드밀, 아크 트레이너, 인클라인 위에서 마스크를 쓰고 잘도 운동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공통점은 완벽한 준비성이다. KF94 마스크가 아닌 덴탈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
같은 자리를 뱅뱅 도는 벨트 위를 걷고 뛰는 행위 자체도 너무 재미가 없다. 애써 TV 프로그램, 유튜브 영상에 시선을 두고 나의 현 상황을 외면하며 한 자리에서 움직이는 일이 너무 지겹다. 야외에서 뛰는 건 상쾌하다는데 잘 걷고 있는 남들 사이를 굳이 파고들어 뛰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어 열의가 생기지 않는다. 땀 흘리는 것도 싫다. 운동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몸에 열이 없어 땀이 잘 나지 않는다. 무산소로 땀이 나면 몸이 후끈해지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유산소로 땀이 나면 몸이 차갑게 식는다. 그 기분이 굉장히 께름칙하다. 다른 사람들은 상쾌하다는데 나는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쓱 쓸고 지나가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지금 하고 있는 PT 프로그램에 맨몸 유산소가 있었으면 나는 20회는커녕 5회도 채우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이렇게 불평불만이야? 먹어놓고! 네가 하겠다고 해놓고! 악으로 깡으로 버텨! 하지만... 하지만... 중얼거리면서 무려 세 문단을 들여 장황하게 유산소가 싫은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아직 내가 유산소가 싫은 이유는 오분의 일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 모든 이유들은 핑계 혹은 변명에 가깝다. 왜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하느냐고 꿍얼대는 내 말을 끊고 PT 선생님은 명료하게 말했다. "무산소로는 지방이 충분히 연소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유산소 운동을 한다
그렇다. 내가 즐긴 술과 음식들이 온몸 곳곳에 남긴 흔적을 지워야 한다. 지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뭉친 셀룰라이트와 무거운 몸과 처지는 기분을 또 과감히 모른 척할 줄 아는 성정도 아니다. 과오를 지우고 건강하려면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한다. 과거의 나를 쥐어패고 싶지만 그때의 쾌락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게 하기 싫은 이유를 웅얼웅얼 입 안에 품고 러닝머신 위를 오른다. 괴로운 현실을 잊기 딱 좋은, 최근 관심사를 담은 영상 콘텐츠를 재생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달리기 속도로 기계를 설정하고, 발을 터벅터벅 구른다. 땀이 주룩주룩 나고, 마스크 속으로 훅훅 더운 숨을 쉰다. 하기 싫은 것 총집합 세트를 견디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다.
패잔병처럼 상실감이 가득한 얼굴로 헬스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기특한 나 자신에 도취될 때도 있다. 이왕 하는 거 그냥 불평불만하지 말고 좋은 마음으로 할 걸 후회가 들기도 한다. 내가 이런 기분을 어디서 또 느꼈더라? 돌이켜보면 유산소 운동뿐만 아니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어김없이 나를 감정하는 시간이 찾아오곤 했다.
불평불만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결국은 해낸다. 대체로 내가 싫어하는 일들의 결론은 그러했다. 유산소 운동 하나로 삶을 돌아보니, 어쩌면 싫어하는 것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하는 음식 재료를 마주했을 때 꾸역꾸역 먹어치우는지, 접시 밖으로 골라내는지, 다른 사람 접시에 슬쩍 미뤄두는지.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으려 길을 돌아가는지,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가는 잠깐을 견디는지, 아예 상대에게 눈을 흘기는지. 싫음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사람의 성격 혹은 됨됨이를 알 수 있달까. 싫어하는 일을 처리하는 건 누구나 힘이 드니까. 그걸 좀 더 매끄럽고 순조롭게 처리하는 사람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나도 싫어하는 것에 의연해지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도심을 벗어나 폭포수를 맞으며 심신을 단련해야 하나? 대다수 직장인이 그러하듯 싫어하는 일을 해내며 얻는 금전적 대가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싫어하는 일을 처리하는 과정을 호의적으로 대할 수는 없나?
단련도 위안도 싫었던 내가 찾은 답을 카드들의 의미에 빗대어 설명하려 한다. 오늘 소개할 8번 힘 카드와 나중에 다룰 14번 절제 카드다.
8번 힘 카드는 한 여성이 사자를 길들이고 있다. 육식 동물 사자는 인간을 먹이로 삼을 수 있지만,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여성이 덩치만 한 사자를 길들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커서는 아니다. 영단어 Strength는 물리적인 힘, 역경, 용기 모두를 함의한 단어다. 상대를 잘 알고 원하는 바를 알아주고, 사로잡는 마력을 갖고 있다. 이 카드가 주는 교훈은 한국어 버전도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다. 위험하거나 곤란한 상황에서도 사자를 길들일 지혜가 있는 자를 뜻한다.
힘 카드를 처음 보았을 때, 왜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색을 썼을까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간 내가 생각하는 힘은 단순히 물리력(Power)이었기 때문이었다. 힘이 세다,라고 하면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사람을 먼저 떠올렸지만 카드에 내포된 의미를 공부하고 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살면서 많은 때에 우리는 힘을 쓴다. 무거운 물건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근육을 기를 때 쓰는 힘만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고 어려운 일을 처리하고 외로운 밤을 견딜 때 우리는 힘을 쏟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힘이 있어야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싫어하는 걸 티 내지 않고 의연하게 해내는 사람은 힘이 세다. 싫으면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지 않나? 미련하게 여길 때도 있지만 그들은 미련하게 발휘한 힘으로 결실을 보았다. 결실이 생기고 나면 미련한 힘은 모두 빛나는 노력으로 둔갑한다. 뭐든 금방 질려하는 나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일평생 도달할 수 없는 성인聖人 같았다. 그들은 단단하고 강인하고, 대단한 으른처럼 느껴졌다. (으른은 나에게 어른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주로 으스댈 자격이 있는 어른을 줄여 부른다.) 평소에 나는 의연한 힘을 지닌 으른 친구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어쩜 그렇게 힘든 기색도 없이 뚝딱 해내는 거야? 너무 대단해. 너무 멋져." 그럼 친구들은 꼭 이렇게 답한다. "유빈이 너도 그렇잖아."
정말 그랬지만, 나는 내가 정말 힘센 으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가끔 강인한 나만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런 때가 있다. 별다른 의식 없이 싫어하는 유산소 운동을 불평 없이 해낼 때, 싫어하는 일을 보란 듯이 뚝딱 처리할 때, 너무 싫은 사람 앞에서 일절 티 내지 않을 때 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내가 갑자기 성불을 한 것도 아니고, 나잇값을 하게 된 것도 아니고, 그저 잠을 좀 푹 자고, 단백질이 풍부한 끼니를 챙기고, 유산소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에게서 동기부여를 얻은 날일 뿐이었다. 평소에 길들일 수 없는 사자를 길들일 수 있는 '힘'이 생겼을 뿐이었다. 내 기준 대단하고 멋진 으른은 일주일에 엿새 이상 힘이 있다. 체력이 좋고, 잘 먹고, 잘 자고, 어딘가에 중독되어 있지 않다. (중독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다음 카드 '절제'를 소개할 때 더 얘기하려고 한다) 나는 일주일에 나흘 하고 반나절 정도 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처럼 조금 더 대단해져보고 싶어서 체력을 기르고, 싫은 유산소도 참아내고, 좋은 표정을 지으려 무던히 애쓴다. 엄청난 힘까지는 필요 없다. 잘 살기 위해서 적당한 힘을 지속하는 나 자신으로 지내고 싶다.
당연한 진실이겠지만, 싫어하는 일을 처리할 때는 누구나 힘들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하기 싫지만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일들, 포기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일생을 관통하며 몸과 마음에 추를 달아놓는다. 힘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그 추를 흔쾌히 이고 지고 간다. 하루에도 수십 번 유산소를 빼먹고 집에 가서 드러누울까 고민하지만 어제보다는 조금 더 흔쾌하게 살고 싶어서 러닝머신 위에서, 한강 공원 근처에서 발을 구르는 요즘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산소 운동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대근육의 화합? 호흡?
나 : 아니. 씨뺩새꺄뚜비두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