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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빈 May 29. 2022

없음과 0이 되어가는 과정

없어짐으로 괴로워하는 당신에게 | 메이저 아르카나 0번 바보

들어가며

2022년에 들어서면서 목표를 아주 많이도 세웠다. 그만두었던 유튜브도 계속하고 싶고, 멸망의 감정 이후 새로운 소설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올해가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문득 공포감을 느꼈다. 지금껏 해왔던 것들 때문에 아주 새로운 것은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더 가깝겠다. 사람들이 나를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지리로 볼까 봐-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지금껏 해둔 것들만 계속 붙들고 더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다. 이 강박에서 도망쳐야 할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같은 지점에서 한 걸음 성장해야 할지 고민하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타로카드를 보고 싶으면 보면 되고, 글을 쓰고 싶으면 쓰면 된다. 그래서 탄생한 <타로카드는 우리에게 이용당했군요(가제)>. 이름을 못 정했지만 아무튼 이런 내용의 시리즈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도달하고 싶은 목표는 거국적이지 않다. 타로카드로 에세이를 쓴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이야기가 결코 줄지 않아서 쓴다. 내가 쓴 이야기가 잘 알려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진 않는다. 다만 소소한 바람이 있다면 타로 카드가 이렇게 재밌고 좋은 놀이 도구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내 친구들은 나에게 신기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타로카드를 알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신기 있고 영험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나는 전문적인 자격증도 없고, 타로카드를 공부하게 된지도 고작 삼 년을 넘긴 초짜다. 누군가는 나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고, 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모든 해석의 영역이 타로카드를 통해 열릴 수 있는 시야 범위라고 생각한다.


발 빼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나는 앞으로 각 카드의 의미와 유사한 일화나 생각을 전하는 글을 쓰려한다. 22개 메이저 아르카나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마이너 아르카나에 담긴 의미도 일상에서 찬찬히 다뤄볼 생각이다. 타로카드를 공부하기 위해 이걸 읽는 건 추천하지 않지만, 이 시리즈를 다 읽고 나면 어느 정도 타로카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0. 없음과 0이 되어가는 과정


여자친구 있어요?

- 아니요. 없어요.

없었어요?

- 아니요. 없어요.

아, 있었는데?

- 아니, 없어요. 그냥.


슈퍼스타 K2 참가자와 심사단 간 거듭 이어지는 대화. 나는 밈이 되어버린 이 대화를 아주 사랑한다. 평소에도 누군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을 때, 대뜸 "아, 있었는데?"라고 대꾸하곤 한다. 이 밈을 알아채고 바로 "아뇨. 없어요, 그냥."이라고 말해주는 사람과 꽤나 오래 친구로 지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있다, 없다'는 그렇게 일상적이다. 쭉 없거나, 쭉 있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새로 생겨난다. '없다'는 빈 공간을 느끼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이 없는 줄 모른다. 나 또는 타인 중 누군가 부재를 의식했을 때에야 '아, 없었구나.' 하게 된다. 여자친구 있어요? 라고 누군가 묻지 않으면 여자친구가 없었던 걸 의식하지 않은 채로 지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흔히들 우리는 0을 '무의 상태'라고 일컫는다. 아무것도 없음. 타로카드에서도 0은 노베이스(NO BASE)를 뜻한다. 아무것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최적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앞 문장을 모른다라고 끝맺은 이유도 아무것도 보장된 게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카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로 이 '없음'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내 욕실에 칫솔이 있다 없다

네 진한 향기가 있다 없다

널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니 전화기는 없는 번호로 나와

<중략>

네가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어

곁에 없으니까 머물 수도 없어

나는 죽어가는데 너는 지금 없는데 없는데 없는데 없는데


씨스타19의 노래 '있다 없으니까' 가사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있고 싶지만 없는 상태일 때 우리는 더 많은 없음을 느낀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고 싶기 때문에 그가 곁에 없는 현재의 자신이 초라하고, 돈이 있고 싶기 때문에 돈이 없는 현재가 안타깝다. 그렇다면 그건 정말 0인 걸까? 있고 싶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없음은 0보다는 굳이 짚자면 마이너스에 가깝다. 괴로움과 외로움을 겪으며 에너지를 쓰게 되니까 말이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플러스로 볼 수도 있겠다. 있고 싶어 하는 상태를 다른 말로 지칭하면 욕심, 야망, 기대, 지향, 절망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이미 그러한 단어들로 심리 상태가 어느 정도 발현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0으로 보기 어렵다.


있다가 없어진 것은 0으로 가는 과정이다. 연인이 있었다가 없어지고, 돈이 있었다가 없어지고, 사람이 있었다가 없어지고 결국 무엇이 존재했다가 이미 사그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상태까지 도달해야 0이다. 있다가 없으니까 허전하다, 괴롭다, 외롭다.라고 문장이 이어지는 게 아닌, 있다가 없으니까... 아, 없네. 이게 0이다. 진정한 무의 상태인 것이다.

타로카드 0번 바보는 그런 0 상태에서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모아둔 카드이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바로 앞에 보이는 길이 절벽이든 사막이든, 꽃길이든 개의치 않고 일단 가본다. 노베이스, 노답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라고 부른다. 아는 게 0이라서 상황 판단이 되질 않는다.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다리가 쉽게 피로할 수 있지만 모르겠고 일단 가본다. 무모함은 실패의 단초가 되거나 운 좋게 무한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끝이 기다릴지 모르지만, 몰라서 한번 가보는 거다.


이 카드가 어떤 상황에 등장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무작정 가보려는 사람에게는 태클을 건다. '정말 그게 맞아? 앞에 절벽이 있는지는 확인해봤어?'라고 옐로카드부터 던지는 것이다. 가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에게는 '아, 생각 말고 냅다 가보시라니까요!'하고 등을 툭툭 떠미는 카드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이 두 사람 모두 갈 것이다. 그 끝이 무엇이든.


그렇기 때문에 0번 바보카드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시작으로 빗대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카드를 바라볼 때 0에서 시작하는 마음을 먼저 떠올리지 않는다. 어쩌다가 바보가 되었을까. 어쩌다가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짐을 싸서 떠나게 되었을까에 이입한다.


나는 수많은 없어짐에도 절망했다.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과도 멀어지고, 멍청비용이랍시고 허망하게 돈을 써버린 일에 괴로워했다. 타인에 의해 없어진 내 자리를 두고 꽤나 많은 시간을 부정적인 생각으로 물들였다. 의지대로 안 되는 일로 죽어라 나를 괴롭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0이 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죽고, 돈도 언젠가 다 써버릴 거고, 내 자리는 먼 훗날 나의 죽음으로 사라진다. 아, 먼 훗날이 아닐 수도 있다. 0이 되기까지 엄청나게 긴 시간이 소요될 줄 알았던 일도 하루아침에 교통사고처럼 일어나기도 하니까. 그러한 사건사고 틈에서 솟아난 내 감정들도 언젠가는 0이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때에는 아주 쉽게 0이 되고, 어떤 때엔 죽어라 노력해도 0이 되지 않는다.


그건 나만이 겪는 일들일까? 아닐 것이다. 자의와 타의를 오가며 무수하게 반복되는 0이 되어가는 과정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MBC 예능 <아무튼 출근>에 출연한 회사원이 한동안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구었다. 그가 말한 '언젠가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라는 모토가 내가 각오한 0으로 향하는 과정과 가장 유사하다. 그는 일할 땐 알차게 몰두하고, 그 외 시간엔 철저히 가족과 안온한 시간을 보냈다. MZ세대가 지향하는 워라밸 그 자체라며 다들 그를 대단하다고 입을 모았다. 만약 그가 저 모토를 위해, 방송과 반대로 회사 일도 남에게 떠맡기고 육아도 내팽개치며 내 삶을 나 몰라라 내던졌다면 TV 출연은 고사하고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지도,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의 방점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경험하는 0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는 자신답게, 소신 있게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멋진 사람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우리는 모두 0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고, 살아가면서 무수하게도 많은 0을 경험했고, 할 것이다. 바보카드는 그럴 때마다 멋진 조언자가 되어준다. 바보 카드는 없어짐과 사라짐을 겪어서 멘붕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도 멋진 조언을 해주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없었을 때도, 그 돈이 없었을 때도, 그 마음이 없었을 때도, 그 기억이 없었을 때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잘 살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0으로 향하는 과정을 멋지게 견디면, 또다시 우리는 이 그림 속 바보처럼 또 대책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될 거라고. 그러니 지금 우리의 소신을 담아 완전한 0을 향해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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