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이 쌓이면서 막내에서 슬슬 벗어날 무렵 나는 지금 회사 아리씨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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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사 동기 C는 나보다 두 살 정도 위였고, 이사님과 대표님을 제외하면 동료 모두가 나보다 나이가 적었다. 전전 직장은 이견 없이 막내였고, 전 직장에서는 신입이 밀려들면서 자연히 막내 자리에서 벗어나는 수순이었는데 돌연 나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이만 많았나? 고작 5년 간의 직장생활이었지만 경험도 많은 축에 들었다. 아리씨는 소외된 청년을 위한 회사라는 미명 아래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오로지 신입만을 뽑았다. 어디서 일을 하고 온 중고 신입의 개념 없이 정규직은 처음 경험해보는 청년들만 모여 있었다. 저는 세 번째 직장이에요, 라는 말이 무색했다. 대부분이 20대 청년이며, 아리씨가 첫 직장이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오늘 길게 이야기할 아리씨 콘텐츠사업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송지민이라는 동료다.
송지민이라는 이름이 나에게 와닿기 전에 01년생이라는 타이틀부터 입에 붙었다. 작년에 만났을 때 고작 스물셋인데 팀장이 됐다. 01년생이 팀장이라고? 따져 묻기도 전에 그녀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짧다면 짧은 내 회사생활에서 지민 팀장은 정말 일을 천재적으로 하는 축에 속했다. 그냥 너무 잘했다. 시키는 일 처리를 잘하는 수준이었다면 굳이 입을 떼지 않았을 거다. 매출을 잘 내고, 협상에 능했다. 올해 지민 팀장의 팀이 우리 회사 매출의 2/3을 목표로 잡았다. MZ오피스 캐릭터들이 밈이 되고, 90년생이 온다 다음 버전은 00년생이 온다고 난리법석들인데, 우리 회사 01년생은 영업 최전선에서 매출을 내는 팀장이다. 대체 이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나는 송지민 팀장이 가히 연구대상이었다.
지민 팀장은 종종 우리 사이에서 해결사가 되어주기도 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오해가 생겼을 때도 나서서 해결해주고, 꼬여 있던 고객사와의 소통도 척척 풀어냈다. 고객의 제안을 맞춰주면서 자연스럽게 고객이 처음 제안했던 예산보다 한 네 배의 매출로 불려왔다. 어떻게 했냐...(진심)고 물으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냥 했는데요?"라고 했다. 진짜 잘한다... 고 칭찬하면 큰 눈을 더 땡그랗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모든 표정과 행동이 연구대상 특유의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무렵 송지민 팀장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한 질문일 거다. 나는 그 질문이 너무 불편했다. 내가 의견을 공유하거나, 당시 내 팀에서 필요한 내용을 요청하면 무조건 돌아오는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설명했다. 끝끝내 돌아오는 건 '아, 네. 알겠어요.' 라는 단출한 대답 뿐이었다. 나는 백 마디를 하는데, 지민 팀장은 늘 두 마디에서 끝났다. '내가 보고를 하는 건가?' 라는 마음이 싹트더니 종내에는 '내가 꼭 설명을 해주어야 하나?' 라는 반발심부터 들었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데 지쳐갔다. 지민 팀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늘 같은 텐션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해야하는 거죠?'
나는 그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쑥 쑤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어깃장을 놓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아는 사이끼리 왜 이래? 싶기도 하고. 나는 내가 하려는 시도들이 그 시도 자체로 보여지지 않고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는 시도 쯤으로 취급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그저 외로워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경력직은 없고, 아리씨만 겪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상황이. 점차 시간이 흐르고 동료들과 낯이 익어가면서 오해는 사그라지긴 했으나 뭔가 지민 팀장과는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해외여행도 가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도 대뜸 '왜 이렇게 하는 거예요?' 라는 질문이 돌아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 친구는 예전과는 다른 세대야. 회사가 가족 같지 않고, 모두와 친해질 필요도 없지. 네가 대뜸 다가가면 과연 그 친구는 반가울까? 오히려 부담스러워 할 걸. 다가가지 말고, 다가오게 해보렴."
불편을 고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는 그냥 따져묻고 싶었다. 왜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하지만 그건 그냥 싸우자고 드는 거나 다름 없었다. 속으로 끙끙 앓다 어른들에게 지혜를 구해도 도저히 모를 말만 들려왔다.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을 다가오게 하는 방법이 대체 뭔데. 되물었지만 모두가 어려워하는 문제라는 말만 돌아왔다. 포기할 법도 한데, 나는 더 궁금해지기만 했다. 이쯤이면 연구대상에 대한 질척거림이었다. 그깟 질문따위 해결되지 않는 게 뭐 대수라고 나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나는 지민 팀장을 너무 너무 알고 싶었다. 모르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 나에게 '왜'를 묻는지.
대수롭지 않은 날에 나는 지민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송팀이 거의 매일 오전에 트렌드 서치 회의를 주도하던 때라,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했다. 그 회의에서 나오는 유의미가 내 업무에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주절주절 떠들었다. 지민 팀장은 01년생답게 '감동이되..'라고 답이 왔다. 피식 웃었지만 도움 요청을 기대하진 않았다. 언제나 알아서 잘 해내는 친구였기 때문에.
그다음 주에 '지금 시간 되세요?' 카톡이 왔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나는 회의 중이었는데 바로 그 카톡을 읽었다. 가끔 나에게 간단한 요청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얼른 자리로 찾아가 무슨 일이냐고 요란법석을 떨었다. 나보다 10cm는 더 큰 지민 팀장을 따라 쫄래쫄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 주도할 카테고리를 선정하는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해결해주고 뿌듯해하던 찰나, 지민 팀장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다. 아플 때 빼고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많이 힘들죠?" 의식할 새도 없이 말이 입밖으로 샜다. 그러자 그녀는 곧 엎드려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얼른 같이 술을 먹자 했다.
"잘한다고 하는데 뭘 잘한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누구한테 물어봐야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순간 무수한 '왜 이렇게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이 스쳐갔다. 정말 순수한 질문이었던 거다. 어리지만 잘해,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이야, 01년생인데 팀장이잖아. 그런 현상 사이에서 지민 팀장의 질문을 적의로 읽은 건 나였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잘하다니, 나는 저 나이에 뭐했지? 라는 질투부터 그래도 내가 경험이 많으니 잘해야 해, 라는 위기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지민 팀장이 잘났기 때문에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여기서 일했던 시간이 다 되감기되었다. 미안했다. 그 앞에서 외로움을 말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지민 팀장의 또래는 전부 학생일 테고, 팀장급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텐데. 회사는 여기가 전부라 조언을 구할 데도 마땅치 않았을 텐데. 나는 내가 겪은 세상만 생각하고 바라봤던 거다. 01년생 팀장이라고 뭐가 그리 다르고, 81년생 팀장이라고 뭐가 다를까. 결국 그냥 내가 겪은 세상으로만 그를 보는 데서 모든 몰이해가 시작되는 것을.
"그날 지민 팀장이랑 얘기한 후로 회사가 편해졌어요."
"오! 저돈데. 저 진짜예요."
술을 마시면 어김 없이 생크림 빵 시리즈를 찾아 헤매는. 대뜸 마주친 복도에서 나를 꼭 껴안아주고 내 볼을 쓰다듬으며 '너무 귀여워요! 생후 3개월(?) 같아요!'라는 말을 회사 안에서 쩌렁쩌렁 울리게 하는. 갑자기 회의에서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을 해내서 사람들을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2023년 종무식에서 "2024년에는 표현을 많이 하겠다"더니 하루하루 그 각오보다 더 발전하는 그런 인간 송지민과 일하고 있다. 매출액의 2/3 하고야 말겠다는 불꽃 투지를 보면서 이젠 정말 한 배에 탄 동료로서 감사하고, 나 또한 대찬 각오를 다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