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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유빈 Jan 22. 2024

6개월 만에 본부장이 되었다

두 달 만에 실장, 반 년만에 본부장. 초고속 승진 뒷이야기

브런치에 타로, 개인적인 생각만 늘어놓다가 최근에 대학내일 회고가 제법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ㅎㅎ) 새 회사 이야기를 좀 써보려고 한다. 대표님한테는 구두로 얘기하긴 했는데, 다른 분들에게 굳이 허락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히려 아주 나다운 일이라고 좋아하실 지도? 다들 자기 얘기 언제 나오냐고 안달일 것 같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맞다. 대부분의 조직생활을 막내로 마무리한 나는 돌연 이직한 회사에서 반 년 만에 본부장이 되었다. 기자, 에디터라는 직무로만 불리다가 제대로 된 직함을 받아본 건 이 회사가 처음이다. 스타트업이라서 가능한 승진이라 하기엔 2015년에 회사를 세운 원년 멤버도 아니고, 경영진을 오래 알고 지내온 것도 아니다. 단지 이 회사의 체계가 보통의 회사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홍대에 위치한 '아리씨'라는 곳이다. 규모는 크지 않다. 지자체 미디어 홍보를 매개로 성장한 회사다. 아주 단순히 현재 수준만 말하면 공무원이 집행해야 할 홍보 예산을 방송, 유튜브, 팸투어 등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컨설팅해주는 회사다. 요즘 친구를 새로이 만날 때마다, 미팅 나갈 때마다 연거푸 설명하다 보니 이제 찔러서 나오는 수준이 되었다. 다들 내가 한 이 년 이상은 다닌 줄 안다. 그만큼 일을 많이 하긴 했다. 여기 와서 만든 문서가 몇 개인지 세려니 까마득하다.


실장에 본부장에 아주 신나서 날아다녔겠다 싶지만 나는 엄마한테도 직함이 바뀐 걸 말하는 걸 까먹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일했다. '이게 되네?'에 가까웠달까? 뭘 해도 칭찬해주는 회사라 당황스러웠다. 처음 이 회사에 와서 만들던 대로 제안서를 만들었을 때 '우리 회사에 새 시대가 열렸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냥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건데 왜 저렇게까지? 부담스러웠다. 으엑, 엑 아니에요~ 몸서리를 쳤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 누가 만들었는데요. 당연하죠."라고 반응하게 되었다.


뭐가 또 바뀌었을까? 좋은 직장 왜 때려치느냐던 우리 아빠는 지금 회사를 잘 들어갔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다. 짜증도 화도 많던 내가 밝아졌다고. 뭔가 좋은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친구들도 그런다. 얼굴이 폈다며 좋은 일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사실 모르겠다. 집에 오면 가끔 여전히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하다. 지금 이 글도 우울함을 못 견뎌 쓰는 것이다. 막연하게 그래도 다르다 싶은 건 결국 이 기분도 끝나고 웃으면서 출근하겠지? 라는 희망? 주말이 끝나고 돌아올 월요일이 너무 싫지만은 않다는 것? 오, 이렇게 쓰고 나니 정말 소름 돋게 좋은 회사 같다. 비관주의자도 이렇게 만드는 회사 무섭다.


https://brunch.co.kr/@beensent/4


(22년 10월에는 제가 이런 글을 쓸 정도로 비관적이었는데요. 조금 머쓱하다.)


나는 입사 초반 전보다 엄청 다양한 일을 했다. 기획전략실은 회사에 없던 조직이었고, 나는 그 조직의 명확한 윤곽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기획안과 글만 쓰던 내가 제안서도 만들고, 교육도 하고, 면담도 하고, 아이디어 회의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코치도 했다. 글만 썼던 내가 글쓰기 빼고 다 하는 상황이 신기했다. 실장이 되어서는 나와 비슷한 콘텐츠 직무였던 후배들과 회의하고, 전략을 짜는 일을 더 많이 했다. 글 쓰는 일 외에 잘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글 쓰기 외에 다른 일로 돈을 버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나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그러다 돌연 두 달만에 기획전략실이 해체됐다. 원래 조직 편성이 잦은 회사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심 속상했다. 내가 못한 건가?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까지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잘해서 해체하는 일도 있나? 의심스러웠다. 나와 함께 기획전략실(a.k.a 천재전략실)을 꾸리던 두 명의 팀원은 둘 중 하나가 신설 팀장이 되어 사업본부로 발령이 났다. 나는 뭘 하는 거지? 뭘 하게 될지 두려웠다. 미래가 예측되지 않는 일에는 도무지 젬병이었다. 나는 잘했어. 더 잘할 수는 없었어. 그게 나의 최선이었어. 속으로 되뇌고 불안을 삭였다. 다 잘했다고 하는데도 나는 계속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본격적인 조직 개편을 앞두고 이사님이 나에게 새로운 일을 설명해주시기로 했다. 내가 기획전략실에서 얼마나 퍼포먼스가 좋았는지, 그동안에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얘기해주셨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없었던 조직의 윤곽이 생기자마자 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앞으로 유빈 실장이 할 일에 대해서 설명해줄게."


앞선 칭찬은 그저 나에게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한 족쇄가 되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민하고 공부하느라."


그때 내 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제가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실장이 생각해서 말하는 것들, 발표 자료들 다 보고 있는데 그건 그냥 하루 아침에 생각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야. 내가 잘 알지. 다른 리더들은 그냥 네가 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네가 잘하기 위해서 퇴근하고도, 주말에도 고민 많이 했다는 걸 안다."


정확한 표현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공부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치기 전에 눈물부터 흘렀다. 기어이 목을 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회사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회사에서 기대를 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지 않은가. 주마등처럼 신입 시절이 지나갔다. 엉망진창이었던 신입 시절 몰래 두 시간씩 일찍 출근하고서도 업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피드백에 일희일비하고, 바보 같은 실수를 연발하던. 잘한다는 칭찬이 아직도 목깃에 붙은 라벨처럼 거슬렸던 건 그 시간들에 내가 떳떳하게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어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서 책을 사다 읽고, 다른 사람들은 어쩌는지 찾아 보고, 베껴 쓰기도 하고 질투도 하면서 스스로를 질책하기만 했는데.


"그래서 네가 공부하는 것처럼 다른 동료들도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렴."


그 뒤로는 새로 생긴 직할 본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다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그 시절 나에게는 너무 큰 그림이라 지금 돌아보니 한 절반 정도 알아들은 것 같다. 나는 그저 일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이토록 나를 상세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이 회사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발견한 데 압도됐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나는 본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뻤다. 승진해서, 멋진 직함을 달아서라기보다 내가 잘하는 어떤 모습이 반영된 본부에서 일하게 되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어서 기뻤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발찌를 자랑하는 노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딱히 그 시선이 틀렸다고 고쳐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도 비스무레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동료들을 보며 "다들 대체 왜 이렇게 회사를 좋아하는 거야?"라고 느꼈다. 열 명 남짓 넘는 동료들을 눈에 불을 켜고 둘러보며 누군가는 이 회사를 극혐하고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아직 나에게 들킨 사람은 없다. (다들 대단함)


앞으로는 남의 극혐을 찾기보다 이제 나는 처음 느낀 일의 재밌음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해준다는 점만으로 이 회사는 내 인생에 어떤 커다란 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쓰다 말다 한, 이 회사에서 느낀 수많은 느낌과 감정들을 차차 적어볼 요량이다. 예전에는 재미 없다거나 못 쓴다고 그러면 어쩌지, 하고 쫄았지만 이제 그런 나는 없다. 일단 해보죠! 저는 재밌게 잘 하니까요!


아리씨가 궁금하다면?(클릭)

https://m.blog.naver.com/rec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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