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불' 장난이야?

기어코 저질러 버렸습니다

by 해서뜬 손유빈

회사에서 불장난했다. 누구 하나 혼낼 사람도 없다. 대표인 내가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냥 냅다 불지르고 싶어서 한 건 아니다. (심정적으로는 그랬다.)

회사를 만들면서 드는 온갖 잡념과 두려움, 방해물들을 훨훨 불태우기 위해서였다.

소지 같은 민간 신앙은 전혀 아니고, 그냥 정말 우리의 막연한 불안들을 날릴 기점이 될 행위가 필요했다.


먼저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빨리 내려놓고 싶은 가장 큰 걱정 거리를 떠올리고 그 걱정거리를 종이에 적는다. 원한다면 그 걱정에서 파생된 수많은 걱정거리를 적어도 좋다. 안전한 공간에서 작게 불을 피워 걱정 종이를 태워버리자. 활활 타오르는 종이를 바라보며 이제부터는 불필요한 걱정거리를 짊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 중에서


책에서 등장하는 '걱정을 다루는 법'의 말미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런 걸 굳이? 내키지 않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날이 왔다. 걱정 태우기를 행동으로 옮기는 그날이. 심지어 회사에서 말이다.


나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대체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대답을 해 봐!"

지난 주 나는 또 사무실에서 화를 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화를 냈다는 사실이 좀처럼 부끄럽지 않다.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다. 가슴에 불이 있는 경상도 여자. 상냥한 서울 여자를 추구했던 때도 있지만 이제는 불가하다는 걸 여실히 깨달아 버린. 참으면 병으로 전이되는 화가 솟는. 아프거나 화내거나를 골라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당연하게도 살아온 세월만큼 나와는 딴판이다. 평소에 표현이 많지도 않고, 불안하면 불안할 수록 말 수를 줄인다. 내가 질문을 해도 답이 제때 돌아오지 않는 때가 많다. 그걸 알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한 배를 탄 이상 한번쯤은 나는 이들의 이 사업에 대한 깊은 속내를 알고 싶었다. 꼭 이들의 말소리로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자그마치 3개월을. 나와 함께 이 사업을 준비하는 사람이 어떤 뜻을 가지고 여기에 함께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일할 것인지, 내가 제안한 일하기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세 달 동안 꾸준히 설명하고 답을 기다렸다.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와도 지겹게 또 물었다. 나는 그 답이 필요한 사람이니까. 같이 만들어간다는 감각 없이 사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내가 원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 사람은 답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알아챌 수가 없었다.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지금도 속터짐) 물론 내 기다림의 방식이 틀렸을 수도 있고, 사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을 수도 있고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어떤 전략은 속도 싸움이다. 우리가 하려는 사업은 크리에이터 비즈니스고, 지금 이 순간에도 트렌드는 휙휙 바뀌고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시점에 맞춰 내가 기획한 것들이 수행되지 않으면 다시 또 전략을 수정하고,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동료들과 소통하고 있으면 나는 그 시기를 모조리 놓치는 것 같다는(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속도대로 움직이면 우리 모두 과로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체 적정 속도는 얼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는 문제다.


결국은 두려움 때문에

여하튼 한바탕 칼바람이 부는 회의를 지나고 개인 면담에서 드디어 왜 내가 3개월간 명확한 답을 들을 수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분노를 잠재우는 방법은 이해라고 했던가. 셋의 대답은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틀린 답을 내놓을까 봐 두려워서, 결과로 보여주는 것에 익숙해서,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 어색해서 등 성과지향적 영업 조직에서 과정지향적인 기획 조직으로 넘어오면서 사라지지 않은 습관 때문이었다. 특히나 업무를 하면서 어렵고, 버거웠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스스로 다그치고 넘어가버려서 프로젝트가 거듭될 수록 이유 모를 피로와 무기력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이건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 엄격한 성향의 사람들이라 갖는 공통점이기도 했다.


에라 모르겠다 불태워버리자

일을 하면서 이런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같이 사업을 하겠다고 머리를 맞대고 백날 떠들기만 해도 모자란 이런 회사에서는 소통의 문제가 생겨버리면 업무가 다 올스톱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같이 집단상담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책이 떠올랐다. 우리의 두려움을 종이에 적자. 이제는 단절하고 싶은 습관과 불안도 적자. 그래서 그냥 다 태워버리자.


1. 아무 종이나 찢어서 각자 자신이 버리고 싶은 습관, 불안, 걱정 다 쓰기

2. 종이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뒷면에 이 사람이 제발 버렸으면 하는 ~~~ 쓰기

3. 돌아가면서 왜 이걸 버리고 싶은지/상대방이 버렸으면 하는지 얘기하기

4. (안전한 공간에서, 불나지 않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한 명씩 자신의 종이를 직접 태우기


이제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하자

우리가 끊어내고 싶어하는 이 모든 것들은 스테인리스 용기 안에서 잠깐의 불꽃으로 사라져갔다. 세상에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피부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같다. 우리는 각자의 종이를 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물도 흘리고, 서로의 불안을 놀리며 웃기도 많이 웃었다. 앞으로는 두려워서 말하지 않는 건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물론 어렵겠지만, 우리는 한 배를 탔으니까 한뼘씩만 더 서로에게 가주기로 하자!


스크린샷 2025-02-18 오후 10.37.40.png 약속한 이미지인데 회사 집기 총출동


keyword
이전 01화식었을 때 간이 진짜인 것처럼